우선 반갑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나도록 나의 20대를 점령했던 브랜드들이 다시 패션의 중심으로 복귀하기 시작했으니. 한때는 패션계를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찬란히 빛나던 톱 브랜드였지만, 트렌드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그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굴욕적인 순간까지 맛봤던 브랜드들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파장을 지닌 트렌드와 함께 다시금 패션의 중심지로 속속 돌아오면서 과거의 영광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추억의 이름 베르사체와 cK의 화려한 복귀 1990년대 거대한 메두사 문양을 전면에 내세운 다양한 아이템과 볼드한 골드 체인 주얼리, 그 주얼리들을 모티프로 한 프린트를 통해 부의 상징으로 통용되며 이탈리아발(發)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던 베르사체. 1997년, 이탈리아적 감성을 럭셔리함으로 재해석해 브랜드 전면에 내세우며 세계를 매료시킨 브랜드의 얼굴 지아니 베르사체가 미국 마이애미의 별장에서 충격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후 베르사체도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이후 그의 여동생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브랜드를 책임지며 새로운 판로를 모색하는 듯 보였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예전만큼의 빛을 발하지 못했다. 전성기 때는 베르수스, 이스탄테, 베르사체 진즈 쿠튀르 등 다수의 서브 브랜드를 거느릴 만큼 번창했지만 현재는 베르수스만이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촉망받는 신예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케인과 지금은 로에베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J.W.앤더슨을 시즌의 게스트 디자이너로 영입하며 부활을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생각만큼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유명 브랜드들이 트렌드에 뒤처지면서 파산의 길을 걷거나 다른 회사에 매각되는 등의 풍파를 겪는 동안 베르사체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존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며 자신의 브랜드를 잘 지켜왔고, 결국 유행이 돌아올 때까지 굳건히 살아남아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옐로 골드의 메두사 문양이 전면에 부착된 가죽 가방부터 볼드한 금장 주얼리, 그리고 그 금장 주얼리들이 확대돼 프린트로 수놓아진 티셔츠나 드레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이 아이템들이 2015년의 핫 트렌드가 된 것이다.
힙합의 스웨그(Swag) 문화와 스트리트 패션이 트렌드의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모든 것이 ‘흥청망청’ 풍요롭기만 했던 1990년대의 화려한 아이템들로 회귀가 이루어진 것이다. 스웨그 하기에는 베르사체의 과감하기 이를 데 없는 프린트와 주얼리만 한 것이 어디 있으랴. 1990년대를 대표하는 것 중에 또 다른 하나로, ‘cK’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던 로고 티셔츠나 면 스웨터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절 캘빈클라인과 게스 등으로 대표되던 디자이너 베이스의 프리미엄 진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cK 로고가 박힌 진은 젊은이들의 머스트 바이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세월의 흐름과 함께 트렌드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cK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티셔츠나 스웨터는 오히려 부끄러움을 유발하는 아이템으로까지 전락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브랜드에서도 내쳐져 존재조차 사라지게 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 브랜드의 이름이기도 한 디자이너 캘빈클라인이 현역에서 물러나며 회사를 PVH그룹에 넘겼고, 그즈음부터 트렌드를 선도하기보다 안정된 비즈니스의 길을 걷는 브랜드로 전환된 느낌이 강해졌다.
하지만 유행은 또 돌고 돌아, 다시 캘빈클라인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와 스웨터들이 패션계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이 트렌드를 놓칠세라 인기 인터넷 쇼핑 사이트 마이테레사닷컴에서는 캘빈클라인의 대표 뮤즈인 케이트 모스의 막내 여동생 로티 모스에게 1990년대 캘빈클라인 로고 티셔츠와 스웨터를 입히는 콜래보레이션 기획전을 열어 론칭 하루 만에 완판을 기록했다.
베르사체와 캘빈클라인이 트렌드에 밀려 고전하다가 유행이 돌아오면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 경우라면, 발렌티노는 조금 다르다. 2007년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인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은퇴하면서 위험에 처하는 듯 보였지만 새로운 디자이너 듀오인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와 피에르 파올로 피촐리를 영입하면서 현재 패션계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됐다.
발렌티노와 구찌, 누구도 예상 못한 화려한 귀환 펜디에 몸담았던 시절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바케트 백을 만든 숨은 주인공인 위의 디자이너 듀오는 그 천재적인 재능을 발렌티노에서 마음껏 발휘해 록 스터드 백과 슈즈, 카무플라주 패턴의 다양한 아이템들로 남녀 불문, 패션 피플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덕분에, 매출 부진과 경영 악화 등으로 패션의 격전지라 불리는 뉴욕에서 매장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발렌티노는 작년에 다시 5번가 한가운데 5층 규모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알렸다.
발렌티노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던 또 다른 이탈리아 하우스 구찌 역시, 브랜드를 오랫동안 이끌던 프리다 지아니니 대신 새로운 수장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영입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시즌 컬렉션에서는 남녀 사이즈 구분이 없는 궁극의 앤드로지너스 룩을 선보이며 화제의 중심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렇게 유행은 돌고 돌며, 동시에 그것을 거슬러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 또한 멈추지 않고 계속되기에 패션계는 언제나 새롭고 바쁘며 또한 잔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돌고 도는 유행과 새로운 유행 창출을 위한 분주한 노력들이 있기에, 매 시즌 입어줘야 하는 잇 아이템 리스트가 생겨난다.
만약 올가을 옷장을 정리하다가 잊고 있었던 캘빈클라인의 로고 아이템이나 엉덩이 쪽 포켓에 ‘Calvin Klein Jeans’라는 로고가 크게 박힌 청바지를 발견한다면, 당신은 행운아일지도. 지금 당장 꺼내서 입어야 하는 ‘잇 아이템’이니 바로 한번 찾아보시길.
Joel Kimbeck 뉴욕에서 활동하는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팰트로, 줄리아 로버츠, 아만다 사이프리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현재 ‘pertwo’를 이끌며 패션 광고를 만들고 있다. ‘레드 카펫’을 번역하고 ‘패션 뮤즈’를 펴냈으며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칼럼을 기고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