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버터, 치즈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의 기록에 ‘수유치(소油赤)’가 등장한다. ‘수유’는 버터 혹은 치즈다. ‘치(赤)’는 몽골식 표현이다. 장사치, 벼슬아치의 ‘치’다. ‘수유치’는 버터, 치즈 등을 만드는 사람이다. 수유치가 등장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병역 문제 때문이었다.
세종 3년에는 상왕(上王) 태종이 국방 외교 병권 등을 쥐고 있었다. 수유치는 ‘상왕 태종의 어전회의’에서 거론된다. 당시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수유치 거주 마을이 있었다. 기록에는 ‘스스로 달단(달(단,달))의 유종(遺種)이라 하면서 도재(屠宰)로써 직업을 삼고 있었다’라고 했다. ‘달단’은 ‘타르타르(Tartar)’ 혹은 ‘타타르(Tatar)’로 몽골 혹은 몽골인이다. 북방 유목민족으로 고기, 우유를 다루는 데 능했다. 변방에 머물면서 도축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쳇말로 ‘공익요원’으로 군역 등 부역을 면제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유는 실로 얻기 어려우므로 혹은 한 호(戶)에서 몇 해를 지나도 한 정(丁)을 바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혹은 몇 호에서 공동으로 한 정을 바치는 사람이 있게 되니’ 문제가 되었다. 더하여 멀쩡한 조선의 장정들까지 이 부락에 숨어들어 병역을 면제받았다. ‘서흥군에는 한 집에 건장한 남자 21명이 있었다’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병역 문제는 늘 골칫거리다.
태종이 수유치 마을에 살고 있는 ‘병역 이탈자’를 찾아내 군역을 부과하라고 한다. 참의 윤회가 반대한다. ‘수유는 어용(御用)의 약(藥)에 소용되며 또 때때로 늙어 병든 여러 신하들에게 내리기도 하니 이를 폐지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수유는 국왕과 노신들의 보양식이었다. 태종은 한마디로 이 부분을 정리한다. ‘그대의 알 바가 아니다.’ 결국 수백 호의 수유치 집들이 폐지됐다.
고려시대 기록에도 수유는 나타난다. ‘고려사’ 충렬왕 27년(1301년) 기록에 ‘병인 초하루에 사재 윤정량(司宰 尹鄭良)을 원에 보내 수유를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원나라에 수유를 조공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우유, 유제품 등이 있었지만 쇠고기, 우유, 유제품 등은 고려 후기 몽골의 한반도 침략을 통해 전래, 확산됐다. 고려 왕실은 우유소(牛乳所)를 통해 우유, 유제품 등을 관리했다. 우유소는 지금의 서울 대학로 부근의 낙산에 목장을 만들고 소를 길렀다. 젖소가 없던 시절이니 새끼 딸린 암소를 데려다 우유를 얻었다. 낙산의 소목장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우유 혹은 유제품을 유(油 혹은 乳), 낙(酪), 타락(駝酪), 수유(소油), 유락(乳酪) 등으로 표기했고 우유, 요구르트, 타락죽, 버터, 치즈 등이 포함됐다. 우유와 유제품은 고위층 반가에서도 사용했다. 명종 20년(1565년)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가 죽었다. 문정왕후 윤 씨의 남동생인 영의정 윤원형도 실각했다. 평소 윤원형은 각종 비리 악행으로 악명이 높았다. 탄핵안이 바로 터져 나왔다. 탄핵 내용 중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타락죽 남용죄’다. 궁궐에서 타락죽을 만드는 이는 낙부(酪夫)다. 윤원형은 궁중 낙부와 타락죽 기구를 자기 집에 배치하고 타락죽을 만들어 먹었다. 더하여 자기 집의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였다. 엄중한 탄핵감이다.
타락죽은 쌀(찹쌀)을 불려서 곱게 갈고 우유를 더한 다음 뜨겁지 않게 끓인 죽이다. 식성에 따라 꿀 등을 더해 먹는다. ‘타락’이란 이름은 건조우유를 뜻하는 몽골어 토락(TORAK)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편을 보면 ‘대비전에 타락죽을 비롯해 몇 가지 죽을 올렸으나 병환에 차도가 없다’는 내용도 나온다. 타락죽은 궁중에서 사용했지만 궁중음식은 아니다. 민간에서도 사용했다. 1540년경 유학자 김유가 기술한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정과, 다식 편에서도 타락을 언급한다.
귀한 음식이었으니 궁중, 반가 모두 귀한 약처럼 사용했다. 정조 시절, 관리들이 ‘이제 10월(음력)이니 관례에 따라 타락죽을 올리게 하시라’고 권한다. 정조가 답한다. “아직 날이 차지 않으니 타락죽을 올릴 필요가 없다. 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 역시 한식의 바탕은 절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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