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보니 시골 풍경보다는 도시 풍경에 익숙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시 문명보다 시골 자연에 더 마음이 끌리지만, 막상 생활할 때는 필요한 물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도시가 더 편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태어나고 스물한 살까지 성장한 강북구 수유리는 서울 외곽에 위치해 있습니다. 북한산 아래에 있는 만큼 자연과 가까운 곳이었지만, 대도시 생활을 체험하게 한 동네입니다.
수유리를 떠나서는 잠원동, 염창동, 대신동에서 살아 왔고, 몇 년 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잠시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삶의 이력 때문인지 저는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삶에 대해 종종 생각해보곤 합니다. 현대 도시 생활은 자유로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안겨주는데, 흥미로운 점은 두 감정이 상반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편으론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고독해지기를 싫어하는 것이 현대인의 마음 또는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서양에서 근대사회가 시작된 이후 도시 생활을 화폭에 담은 화가는 적지 않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인상파 화가들과 그 후예들은 당시 정치의 중심이자 예술의 중심이던 파리를 즐겨 그렸습니다. 모네와 피사로는 파리의 다양한 모습을 작품으로 남겨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도시 풍경을 그린 것이지 도시인의 생활을 세밀하게 주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시 풍경과 도시인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은 대표적인 화가로는 미국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를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호퍼는 잭슨 폴록, 앤디 워홀과 함께 20세기 미국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입니다. 폴록과 워홀은 개성이 강한 화가입니다. 폴록이 큰 캔버스 위로 물감을 흘리고 끼얹는 등의 ‘액션 페인팅’을 선보인 추상표현주의 화가라면, 워홀은 순수미술과 대중미술 간의 경계를 허문, 광고와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 ‘팝 아트’의 화가입니다.
외로운 도시인
이들과 비교해 호퍼의 작품들은 고전적이며 소박합니다. 그는 서양 미술의 주요 흐름인 풍경과 인물을 화폭에 담았다는 점에서 고전적입니다. 동시에 그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점에서 소박합니다. 그가 주로 활동한 20세기 전반 유럽의 회화, 예를 들어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와 비교해볼 때, 이런 호퍼의 고전성과 소박함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렇게 고전적이고 소박했음에도 그의 작품들은 관람객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 미술연구소에 있는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1942)은 호퍼의 대표작입니다. 그림 속의 시간은 한밤에서 새벽으로 가는 시점인 듯합니다. 길게 이어진 바를 사이에 두고 종업원과 한 커플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뒷모습을 보인 채 혼자 앉아 있습니다.
대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을 담은 이 작품은 화려한 도시 풍경 속에서 도시인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림 속의 커플이나 혼자 앉아 있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호퍼는 50여 년 동안 살았던 뉴욕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간이식당에서 이 작품의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만큼 이 그림은 미국적인 대도시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북촌과 서촌을 찾는 사람들
호퍼의 작품들이 보여주듯, 현대 도시는 여러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도시학자들은 현대 도시가 편리함과 익명성을 선물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상품과 서비스를 떠나 살 수 없는데, 도시는 질 좋은 상품과 다양한 서비스라는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게다가 도시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익명성을 안겨줍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다른 이들이 내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게 되면 피곤함을 느낍니다. 도시의 익명성은 피곤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도시의 편리함, 익명성과 도시의 불친절, 외로움은 동전의 앞뒷 면과 같습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도시의 변화는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불친절과 외로움을 안겨줍니다. 도시학자들에 따르면, 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거나 그 결과가 낯설 경우 인간은 자연스럽게 무관심 전략을 취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무관심 전략은 다른 이들을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도시인들 사이의 이런 불친절은 결국 외로움을 낳게 합니다.
이렇듯 편리함과 불친절, 익명성과 외로움은 현대 도시인들이 갖는 이중적인 마음입니다.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에서 제가 발견한 것도 바로 도시인의 정체성입니다. 화려한 불빛 아래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살지만, 정작 마음 밑바닥에는 외로움과 소외감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삶에 지쳐 누군가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분주한 도시 생활에선 그럴 마음의 여유도,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내 말을 들어줄 친구도 찾기 어렵습니다.
이런 삭막한 도시 생활은 우리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인간이란 본래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상담학을 공부하는 제가 보기에는 최근 서울에서 북촌과 서촌 같은 오래된 동네가 관심을 끄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수유리에 살던 제 어릴 적 경험을 돌아보면, 그때의 서울은 도시이면서도 시골 같기도 했습니다. 아직 아파트가 많이 세워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골목길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지냈습니다. 저와 같이 서울 외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한 정을 나누면서 때로는 오순도순하게, 때로는 시끌벅적하게 살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하철 안국역에서 나오면 만나게 되는 북촌이나 경북궁역에서 나오면 만나게 되는 서촌을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북촌이나 서촌이 보여주는 모습은 조선 시대의 풍경이라기보다는 경제개발 시대의 초기 풍경입니다. 북촌은 최근 많이 변화했지만, 서촌은 여전히 그 시절의 모습을 적잖이 갖고 있습니다. 누상동과 누하동을 산책할 때면, 통인시장을 구경할 때면, 저는 어린 시절 수유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갖게 돼 마음이 편안해지고 약간 기분 좋은 흥분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서촌과 북촌에는 도시의 따뜻함이 담겼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
이런 맥락에서 최근 진행되는 도심 재개발은 제게 양가감정을 갖게 합니다. 도시학자들은 도심 낙후지역에 고급 주거 및 상업지구가 새로 조성되는 것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선 광화문이나 종로1가 지역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낙후된 건물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면서 중·상류층의 주거지구와 이와 관련된 상업지구가 형성돼왔습니다. 신사 계급을 뜻하는 젠트리(gentry)의 주거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쾌적한 주거 및 사무 공간이 새롭게 조성되는 것은 서울이 그만큼 발전한다는 점에서 좋은 일입니다. 그곳에서 일하거나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추억이 담긴 곳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선, 저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쾌적함 속에서 오히려 느껴지는 삭막감 탓에 아쉬움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지켜보면서 ‘나의 도시’였던 서울이 다른 사람들의 도시인 서울로 바뀌어가는 느낌을 가졌다면 저 역시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일까요.
빌딩과 자동차는 도시의 또 다른 주인입니다. 특히 자동차는 도시 생활을 하는 데 필수품이기도 합니다. 자동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호퍼의 작품이 있습니다. ‘밤샘하는 사람들’과 함께 널리 알려진 ‘주유소’(Gas·1940)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주유소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길가에 있는 한 모빌 주유소의 평범한 풍경을 담았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 느낌을 안겨줍니다.
환한 주유소와 어두워가는 숲, 주유소라는 문명의 이기와 혼자 주유 시설을 점검하는 사람의 쓸쓸함, 그리고 시골인 듯하면서도 도시의 외곽인 듯한 풍경이 시선을 잡아끕니다. 전형적인 미국 풍경이지만, 우리나라를 여행할 때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이 작품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깊은 인상을 주는데, 이 그림을 볼 때 제가 갖는 느낌은 한가로움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묘한 감정입니다.
따로, 또 같이
호퍼의 작품을 통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현대 도시인의 정서적 정체성입니다. 자유로움과 외로움이라는 이중 감정을 느끼며 각자의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면서 살아내는 존재가 현대 도시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유를 추구하지만 동시에 외롭고 쓸쓸한 현대인의 이중적 모습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개인의 심리적 성숙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잘 통합된 형태는 함께 있을 수도 있고 혼자 있을 수도 있는, 즉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오케스트라의 화음이 좋을 때가 있고 독주가 아름답게 들릴 때가 있듯이, 인간 역시 함께 어울려야 할 때가 있고, 혼자 견뎌내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를 적절하게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건조하고 차가운 현대사회에서 적절한 기능을 발휘하며 살아간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따로’도 잘 존재할 수 있고 ‘같이’도 잘 어울릴 수 있는 태도를 위해 필요한 능력은 균형감각일 것입니다. ‘따로’의 감정이 과잉되면 외로움을 느끼고, ‘같이’의 감정이 과잉되면 답답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이 오래 지속되면 우울감에 빠지기 쉽고, 답답함이 오래 지속되면 불안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율을 추구하는 완전 지향의 존재인 동시에 연대를 갈망하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완전함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 도시인의 숙명, 아니 인간 본래의 사명이 아닐까요. 오늘도 도시 생활에 지쳐 있다면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호퍼의 작품들이 제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박상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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