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다. 나만 ‘가을 타는’ 남자 또는 여자일까. 아니다. 인간은 향수병은 물론이고 반대로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타향병’도 앓는 존재다.
이 책은 특정 여행지 정보를 담거나, 여행지 속 역사 문화 감성을 담은 여행 에세이와는 다르다. ‘인간이 왜 여행을 하고, 어디로 향하는지’란 근원적 질문부터 여행의 기쁨과 고통을 통해 깨닫는 삶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여행 문학의 대가로 통하는 미국 소설가 폴 서루. 그는 50년간 코스타리카와 그린란드, 앙골라, 뉴브리튼 섬 등 세계를 누비며 여행에 관한 글을 써 왔다. 구절구절 여행 속에서 느낀 그의 묵직한 깨달음이 스며 있다.
“여행에 대한 동경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움직이고 싶은 욕망, 호기심을 채우거나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싶은 욕망, 이방인이 되고 싶은 욕망, 친구를 사귀고 싶은 욕망, 미지의 것을 기꺼이 마주하고 싶은 욕망….”
이런 말도 있다. “여행은 자학이며 슬픈 기쁨이다.” “어떤 곳이 낙원이란 명성을 얻게 되면 이내 지옥으로 바뀐다는 사실은 공리에 가깝다.”
책을 읽다 보면 여행철학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 저자는 최고의 여행이 될 조건도 제시한다. 우선 여행은 ‘혼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독은 집에 머무는 자에겐 시련일지 모르지만 여행하는 자에게는 꼭 필요한 조건이다. 동반자, 부인, 여자친구와 함께 여행하는 것은 둥근 유리 천장 안에 있는 새들처럼 보인다.”
그는 또 비행기보다는 기차 여행을 권한다. 비행기 여행이 ‘갑옷을 입은 연인’이라면 기차는 “떠들썩한 술잔치, 카드놀이, 음모, 숙면, 러시아 단편소설처럼 구성된 이방인들의 독백. 심지어 뛰어내리려는 충동조차 가능하다”고 이 책은 예찬한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여행 안내서를 활용해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들을 확인하라. 그런 뒤 그 반대 방향으로 가라” “영국에서는 토요일 축구경기 후 불량배들을 조심하라” “낯선 곳에서 위협을 느낀다면 ‘쏘지 마세요. 나는 기자입니다’라고 말해라. 다만 안전은 보장 못한다” 등 위트 넘치는 조언이 적지 않다.
부화 직전의 오리알을 삶은 필리핀의 발룻, 수탉 볏으로 만든 이탈리아의 피난치에라, 아이슬란드의 부패시킨 상어 요리 하쿠리 등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먹을거리 이야기도 흥미롭다. “한국은 꿈틀거리는 다리를 생으로 먹는 산낙지가 인상적”이라는 게 그의 촌평이다.
책을 덮으면 책 속에서 수백, 아니 수천 번 나온 여행이란 단어보다는 ‘인생’이란 단어가 머리에 남는다. 여행을 사유 대상으로 격상시키면 결국 인생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리라.
이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유쾌한 문장에서 폴 서루를 따를 이가 없다”고 극찬했다.
:: 함께 읽을 책 ::
가을에 어울리는 촉촉한 여행 에세이를 출판사 편집자들에게 추천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문학사상)는 미국, 멕시코, 몽골 등을 다니며 쓴 여행기로 그만의 독특한 여행법과 인간에 대한 시각을 담았다. 영국 작가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웅진지식하우스)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의 미국 디트로이트까지 세계 속 낡고 쇠락한 폐허를 여행하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로 꼽는 책이다. 소설가 김연수가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의 국경을 넘나들며 쓴 ‘여행할 권리’(창비), 시인 허수경이 독일을 여행하며 쓴 ‘너 없이 걸었다’(난다), 혼자 떠나는 여행자를 위한 ‘여행생활자’(사흘)도 이 계절에 어울리는 여행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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