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1970년대 중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감옥에서 온 한 장의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편지의 주인공은 은행 강도로 징역 5년형을 받은 20대 청년이었다. 청년은 어릴 적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중학교만 겨우 마친 후 학교에 가고 싶어 막노동으로 등록금을 모았다. 하지만 쉽게 돈을 벌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은행을 털다가 검거됐다. 》
감옥생활은 그에게 전환기가 됐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청년 범죄자를 개도하자’는 사회운동이 펼쳐졌고 청년이 수감된 감옥에 툴루즈대 교수가 찾아와 고전과 철학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명석함이 드러났다. 곧 학사자격시험도 통과했다. 출소일이 다가오자 그는 세계적 석학으로 이름을 날리던 데리다에게 ‘당신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다. 데리다는 흔쾌히 허락했고, 청년은 데리다의 지도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된다.
22일 한국을 방문한 기술철학의 대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프랑스 퐁피두센터 혁신연구소장(63)의 이야기다. 그는 이날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소장 김성도)가 주최한 학술행사에서 ‘자동화 사회’를 주제로 강연했다.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그를 만났다.
“눈, 귀, 손, 뇌…. 인체 속 감각기관은 스마트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기술 발전을 통해 무한대로 팽창했습니다. 이런 기술과 결합한 신체는 이전보다 400만 배나 빠르게 일을 처리하죠. 이로 인해 인간이 갈수록 필요 없게 되고 있죠.”
그는 기술을 ‘파르마콘(Pharmakon·독약이자 해독제)’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갈수록 독약 기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모든 부분에서 자동화가 폭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20년 안에 세계 일자리의 50%가 없어질 것이란 진단이 나오고 있죠. 일자리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지구적 현상이에요.”
스티글레르 소장은 “이 정도 되면 경제위기가 아니라 사회의 지속이 어려운 불능 상태”라며 “기술과 자동화로 물질적 빈곤뿐 아니라 정신적 가치마저 빈곤해졌다”고 덧붙였다. 그의 우려는 계속됐다. “현대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터득하기보다 인터넷 등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입당하고 있죠. 결국 사람의 능력이 줄고 기술에 흡수됩니다. 인간이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면서 문화, 정신적 가치마저 빈약해지는 ‘모든 것의 비천함’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비판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학자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 그는 2005년부터 기술철학을 바탕으로 정치, 문화 활동을 연구하고 대안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운영해왔다.
“자본주의 속 인간의 모든 행위는 에너지가 소모되는 방식, 즉 ‘엔트로피(entropy)’ 패러다임 속에서 이뤄집니다. 반대 개념인 ‘반(反)엔트로피’적 사고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켜야 합니다. 즉,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물질과 능력을 조금씩 기여하고 재분배해 공유와 연대가 높아지는 구조를 만드는 거죠.”
그는 인터뷰 말미에 청년 시절과 데리다를 추억하며 “어두운 삶의 밑바닥에서 나를 구원해준 빛은 지식, 즉 ‘앎’이었다”며 “나도 다른 사람과 빛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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