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에 사는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눈을 수십 가지로 분류해 부른다. 중요한 것을 부르는 이름이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식물이 있다. 바로 벼다. 식물 자체일 때는 ‘벼’ 혹은 남부지방에서는 ‘나락’으로 부른다. 열매를 말려 먹을거리가 되면 ‘쌀’이 되고 남겨진 껍질은 ‘겨’가 되며 요리가 되면 ‘밥’이 된다. 이뿐만 아니다. 열매를 수확하고 남은 지푸라기는 가마니, 새끼줄, 가방, 짚신, 초가의 지붕이 되었다. 이 수많은 이름이 얼마나 우리에게 이 식물이 소중했는지를 말해준다.
지난해 봄 속초로 이사를 한 뒤 정원을 만들면서 벼를 꼭 심고 싶었다. 작은 논을 정원 한쪽에 만들려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어서 결국 관상을 목적으로 참나무통에 벼를 심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잎이 올라오는 모습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꽃이 피고, 가을이 되어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지켜봤다. 가끔 지인들이 찾아와 참나무통 속에서 자라는 벼를 보고 “어머? 이건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나는 “잘 아실 텐데요”라며 애를 태웠다. 논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만 보았다면 벼라는 식물의 구체적인 모습을 잘 모를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쌀이 이런 풀에서 나오는 거였구나!” 하는 어른도 있다.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당연한 일일 수 있기에 걱정이 앞선다.
쉰을 곧 앞두고 있는 나도 만 12년이 넘는 학창시절 내내 국어 영어 수학을 머릿속에서 놓아본 적 없이 공부를 해왔다. 지금의 우리 아이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만 중요할까? 우리 삶의 가장 밀접한 요소 중의 하나인 식물과 자연의 세계를 이렇게 배워온 기억은 없다. 내가 배운 식물의 공부는 정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지금껏 쌀이 강아지풀처럼 생긴 식물에서 나온다는 것에 신기해하는 어른이 돼 있을 것도 같다. 진심으로 이게 정말 올바른 우리의 배움인지에 대한 거듭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식물의 공부는 원예학자나 농부만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이 지구에서 식물 없이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식물과 사람이 잘살 수 있는지, 식물을 통해 우리 삶을 발전시키는 방법은 무엇인지, 어떻게 식물이 병충해로 죽고 사는지 등을 배우지 않는다.
벼의 공식 학명은 ‘Oryza sativa’다. 1년생인 까닭에 뿌리를 남겨두어도 내년에 다시 올라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해마다 씨를 받아 다시 발아시켜서 심는다. 벼라고 해서 모두 물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수확 중인 벼는 크게 네 종류가 있다. 물이 없는 일반 흙에서 자라는 벼가 있고, 빗물 정도만 아주 살짝 물에 적셔진 채 자랄 수 있는 벼, 물속에 뿌리를 담그고 사는 벼, 그리고 완전히 깊은 물에서 사는 벼로 구분된다. 우리가 짓고 먹고 있는 벼는 뿌리만을 살짝 물속에 담그고 사는 갈대와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는 종류다.
벼는 세계 5대 작물 중에서도 으뜸인 식물이다. 아직도 100여 개국에서 식량으로 재배를 하고 지구 전체의 경작지 중에 벼를 키우는 면적이 가장 넓다. 벼를 재배했던 원조는 중국이지만 우리나라도 중국만큼이나 그 역사가 깊다. 재배 지역은 대부분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 등인데 최근에는 미국과 남미, 아프리카에서도 벼를 재배한다. 그런데 벼에는 또 다른 측면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이 지구의 풍경을 바꾼 식물이라는 점이다.
중국과 한국, 동남아시아같이 쌀을 생산하는 농업지역은 항공사진을 찍으면 구불거리는 산의 지형을 따라 농부가 만든 논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구불거리는 논의 모습은 디자인적으로도 탁월하다. 그래서 중국의 조경학자 위쿵젠 교수는 이 논의 디자인을 두고 ‘생존을 위한 예술’의 극치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 모습도 과연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이 논이 점점 사라진다. 논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단지가 나타나고, 공장이 들어서고, 경제성이 없는 논이 밭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위 교수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풍경의 디자인은 그저 기능과 경제성에 발목이 잡힌 저급한 것일 뿐, 그 옛날 우리 조상이 했던 아름다운 풍경 디자인의 방법을 이미 잊은 지 오래됐다고 한탄한다. 그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잣대가 어떻게 편리함, 기능, 경제성만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시름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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