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은 반가(班家)의 음식이다. ‘고음(膏飮)’ ‘곰’이란 이름으로 조선시대 음식 책에도 등장한다. 고기 국물이니 ‘육즙(肉汁)’이다. 제사에 사용하는 탕국이나 진주(晉州) 비빔밥의 ‘보탕국’ 등은 곰탕과 닮은 면이 있다. 모두 고기 국물이다.
설렁탕이 선농단(先農壇)의 행사에서 유래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주장’일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성종편에 선농단, 설렁탕이 등장한다는 말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 표현은 없다. 선농단 행사 때 의례적으로 먹었다거나 국왕의 행렬이 비를 만나서, 구경하던 백성들과 끓여 먹었다는 표현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동화다. 국왕이 비를 만나면 빨리 환궁하는 것이 원칙이다. 왕조실록에는 “선농단 행사를 마친 후, 고기(生肉)를 대비전에 올렸다”는 기록은 있다. 고기는 귀했고 제사에 사용한 고기는 더더욱 귀하게 여겼다.
설렁탕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고기, 정육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궁궐이나 지방 관아다. 이곳에는 고기를 납품하는 이들이 있었다. 백정(白丁)들이다. 조선 초기에는 달단족(달(단,달)族) 등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들이 도축을 도맡았다. 일정 부분의 고기를 도축, 납품하면 부산물이 남는다. 뼈 내장 꼬리 머리 피 등이다. 냉장시설이 없었으니 솥에 두루 넣고 푹 고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언론인 고 홍승면 씨는 “설렁탕 집 옆을 지나가다가 하얗게 탈골한 소머리를 보고 질겁한 후 오랫동안 설렁탕을 먹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도 설렁탕에 소머리뼈를 넣었음을 알 수 있다.
형평사(衡平社)는 ‘백정의 신분차별 철폐’ 등을 내걸고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 조직이다. 진주 형평사의 간부 출신이 서울에 와서 오늘날 종로통에서 설렁탕 집을 열었다. 문제는 아이들의 진학이다. 신분제도는 이미 갑오경장 때 철폐되었으나 여전히 상민(常民)들은 “우리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반대한다”며 항의한다.
동아일보 1930년 11월 12일의 기사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등장한다. 조합의 자율적인(?) 결정으로, 냉면, 장국밥, 떡국, 대구탕반 등 7가지 음식의 가격은 원래 20전에서 15전으로 내린다. 문제는 설렁탕 값이다. 기사에는 “설렁탕은 13전으로 내리기로 결정했으나 관할 종로서에서 10전으로 내릴 것을 종용하고 있으며 아마 10전으로 내릴 것”이란 내용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값을 행정관청에서 ‘지도’하는 것도 재미있다. 설렁탕은 다른 음식보다 싸다. 같은 길거리 음식인데 장국밥이나 대구탕반보다 싸다. 고기가 아니라 뼈가 위주고 그나마 고기도 내장 등 부산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실제 “설렁탕을 주문한 후 5전을 더 주면 고기를 후하게 얹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연히 그 고기는 내장이나 머리고기 등일 것이다.
가격이 싸고 영양가는 풍부하니 설렁탕은 ‘길거리 서민 음식’으로 자리매김한다. 1930년대 설렁탕은 주요한 ‘배달음식’이 된다. 설렁탕 값을 내놓으라는 배달꾼과 ‘주인이 오면 주겠다’는 사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주먹다짐으로 발전한다. 가해자인 설렁탕 배달꾼이 종로서에서 “우리 뒤에는 300명이 있다”고 한 내용을 보면 당시 경성(서울)에는 상당수의 설렁탕 배달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의 소설에 “설렁탕 그릇의 탑을 둘러멘 ‘뽀이’의 자전차가 사람들 사이의 물결을 바느질한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당시의 잡지 ‘별건곤’에는 ‘신식 부부는 하루에 설렁탕 두 그릇’이라는 내용이 있다. 부모로부터 유산을 제법 받은 젊은 부부가 신혼 초에는 흥청망청하다가 슬슬 돈이 떨어진다. 결국 하루 두 끼, 가격이 싼 설렁탕이다. 느지막이 일어나니 밥을 지을 염이 나지 않는다. 오전에 설렁탕을 배달해 먹고, 오후에도 차려입고 산책이나 하다가 저녁에도 설렁탕을 먹는다는 뜻이다.
반가 출신의 ‘양반인 양’하는 이들은 여전히 설렁탕을 피했다. 정히 먹고 싶으면 배달이다. 상민이나 천민 등과 더불어 설렁탕을 먹는 것도 싫고 식탁에 파 소금 등이 있는 것도 못마땅하다. 곰탕은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설렁탕은 소금 간이 제격이다. 이것도 설렁탕과 곰탕의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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