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뜰에 가면 다소곳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소녀 청동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소녀는 오늘도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읽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암울한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고뇌를 ‘잎새에 이는 바람’으로 노래한 이 시는 가히 국민 애송시라 할 만하다.
한데 이 시의 이 구절, ‘잎새에 이는 바람’은 다른 이유로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언중이 자연스레 쓰는 ‘잎새’를 우리 사전은 충청지역에서 쓰는 ‘잎사귀의 방언’으로 묶어두고 있어서다. 과연 그럴까. 많은 이가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공부한 윤 시인이 왜 충청방언을 썼을까 의아해한다. 미국 작가 O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의 번역자도 충청도 출신이었을까. 설령 둘 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잎새와 잎사귀의 말맛 차이는 어쩔 텐가. 이 시를 읽으며 잎새는 방언이므로 잎사귀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잎새를 방언으로 묶어둔 건 우리 사전의 속 좁음을 보여줄 뿐이다. 북한에서는 ‘잎새’를 문화어로 삼고 있다.
잎새를 표준어로 삼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음을 보여주는 실례(實例)가 여럿 있다. 나래와 내음, 뜨락이 바로 그렇다. 이 세 낱말은 말맛이 좋아 문학작품에 널리 쓰였지만 우리 사전은 나래는 날개의 방언, 내음은 냄새의 방언, 뜨락은 뜰의 북한어라며 오랫동안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1년 8월 31일 내음과 나래는 문학적 표현으로 쓸 수 있으며, 뜨락 역시 추상적 공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문학작품, 특히 시는 낱말 하나가 상처를 입으면 시 전체가 파괴될 만큼 말맛을 중히 여긴다. 따라서 방언으로 쓴 시라 하더라도 시어로서의 가치는 폭넓게 인정하는 게 옳다. 잎새에 배어 있는 심상과 맛깔스러움을 인정하고 별도 표준어로 삼는 걸 검토할 때가 됐다.
표준어 원칙에 ‘서울말’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어선지 서울말이 아니면 우리는 너무 쉽게 사투리라고 무시해 버린다. 말의 지역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널리 쓰는 말은 표준어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말이 풍부해진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가슴을 파고들지만, 잎사귀에 부는 바람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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