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기 전남 일대, 백제 아닌 마한의 지배 가능성 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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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복암리 고분 발굴 20년, 새롭게 조명되는 학설

20년 전인 1995년 11월 발견된 전남 나주시 복암리 3호분 96석실 내부(위). 마한 고유의 매장법인 항아리로 만든 옹관들이 놓여 있다. 복암리 고분군은 4개의 고분이 근처에 모여 있다(아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20년 전인 1995년 11월 발견된 전남 나주시 복암리 3호분 96석실 내부(위). 마한 고유의 매장법인 항아리로 만든 옹관들이 놓여 있다. 복암리 고분군은 4개의 고분이 근처에 모여 있다(아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영산강이 휘돌아 나가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대형 봉분 4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치 해자처럼 봉분 주위를 둘러싼 폭 4∼5m, 깊이 1m의 구덩이가 눈길을 끈다. 이른바 주구(周溝)라고 불리는 것으로 백제나 신라, 고구려 무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대 마한 고유의 묘제다. 10일 전남 나주시 복암리 고분군. 4개 고분 가운데 너비 38∼42m, 높이 6m로 가장 큰 규모의 3호분에 오르자 지평선 멀리 월출산까지 보였다. 올해 복암리 3호분 발견 20주년을 맞아 당시 이곳을 발굴한 임영진 전남대 교수와 현장을 찾았다. 임 교수는 먼 산을 바라보며 “1500년 만에 세상에 나온 3호분의 첫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백제 전성기인 4세기 중엽 근초고왕이 전남 일대를 장악했다는 역사학계의 통설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 마한의 숨결 1500년을 뛰어넘다

“어어어, 안에 뭐가 있다!”

1995년 11월 복암리 3호분 이장(移葬) 공사를 지켜보던 임 교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고분 위에 쌓인 흙더미를 걷어내던 포클레인이 순간 멈췄다. 흙구덩이 사이로 감춰져 있던 돌덩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 3호분 천장석이었다. 몸을 엎드린 채 돌 틈 사이로 안을 살펴보던 임 교수의 가슴이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퇴적토로 가득 들어찬 석실 한 귀퉁이에 옹관(甕棺)의 윗부분이 살짝 드러나 있었던 것. 커다란 항아리로 만드는 옹관은 마한의 독특한 매장법이었다. 임 교수는 이곳이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임을 직감했다.

당시 복암리 3호분은 인근 마을 문중의 선산(先山)으로 100년 넘게 쓰였다. 전남도 지정 문화재가 된 뒤 발굴이 아닌 복원 정비를 위해 봉분 상단에 매장된 문중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3호분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임 교수는 “복원 공사를 채근하던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해서 발굴로 전환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며 “고(故)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께 직접 현장을 보여드린 뒤에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임영진 전남대 교수(오른쪽)와 제자인 오동선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복암리 3호분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임영진 전남대 교수(오른쪽)와 제자인 오동선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복암리 3호분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근초고왕 마한 점령 통설 흔들려

1998년까지 3년간 발굴이 진행된 복암리 3호분에서는 옹관묘 22기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11기 등 무려 41기의 매장시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3∼7세기에 걸쳐 수십 개의 무덤이 3층으로 조성돼 ‘아파트형 고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특히 1996년에 조사된 ‘96석실’에서는 같은 시기 백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형 옹관 4기를 비롯해 금동신발, 마구류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부터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전남지역이 점령됐다는 사학계의 통설에 의문이 제기됐다.

문헌사학계 다수는 “서기 369년 백제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심미다례(沈彌多禮) 등 영산강 일대 국가들을 정복했다”는 내용의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근거해 4세기 중엽부터 백제가 나주 일대의 마한 소국들을 지배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한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중국 진서 기록이 290년까지만 확인된 것도 근거로 든다. 이에 따라 백제 금동신발이 출토된 복암리 고분 석실은 백제에서 파견된 관리가 묻힌 것으로 봤다.

그러나 96석실에서 나온 옹관과 석실 구조가 백제가 아닌 이 지역 고유의 양식이라는 사실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게다가 문헌사학계가 주장하는 백제 정복시기(4세기 중엽) 이후인 5세기 내내 영산강 일대 무덤의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는 현상도 간과할 수 없다. 예컨대 백제 무령왕릉의 봉분 지름이 약 20m인 반면 복암리 고분은 30∼40m에 달한다. 임 교수는 “문헌사학계 다수설에 따르면 신하의 무덤이 왕릉보다 더 크게 지어진 셈”이라며 “요즘도 직급에 따라 관용차의 배기량이 달라지듯 고대사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발굴된 인근 정촌 고분에서도 백제와 다른 양식의 석실이 발견됐다. 백제가 지배한 지역으로 간주하기 힘든 고고학 증거가 잇달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문헌사학계에서도 4∼5세기 백제의 마한 지배는 수도에서 거주하는 지방 유력자들을 통해 백제왕이 다스리는 ‘간접 지배’ 형태였을 것이라는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적어도 이 시기 백제의 직접 지배설은 점차 힘을 잃고 있는 셈이다.

나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백제#마한#나주#고분#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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