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화백(1913∼1974)의 사후 발간된 산문집 ‘그림에 부치는 시(詩)’에는 ‘그림 안 파는 이야기’란 제목으로 1955년 3월 쓴 글이 실려 있다.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두어 폭 팔아서 구라파 여행을 3년 할 수 있다든지 한 폭 팔아서 그 흔해 빠진 고급 차와 바꿀 수 있다든지 한다면야 나도 먹고 사는 사람인지라 팔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러나 어디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인사가 있기를 바라겠는가.”
60년이 지났다. 그가 1971년 그린 유채화 ‘19-Ⅶ-71 #209’가 10월 홍콩 경매에서 3100만 홍콩달러(약 47억 원)에 팔려 한국 현대미술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물가가 올랐지만 3년 유럽여행은 물론 평생 세계여행을 해도 넉넉할 돈이다.
2016년 1월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김환기 화백의 기획전 표제는 ‘선·면·점’이다. 김 화백은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미국 뉴욕으로 떠나 소재의 형태를 버리고 선, 면, 점만 남긴 작품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이때의 그림은 그의 생전에 잘 팔리지 않았다.
병원에서 죽음을 맞기 직전 그린 2층 전시실의 면직캔버스 유채화들은 온통 우울한 잿빛이다. 반지하 작업실 바닥에 종일 엎드린 채 점점의 번짐을 하나하나 반복해 둘러 채워가며 견뎌낸 육체의 고통이 어렴풋이 전해진다. 이른 죽음을 예감한 듯한 이 시기 김 화백의 일기에서도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맑고 깊은 바다를 닮았던 푸른빛이 서서히 걷혀갔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찍어가는 점. 어쩌면 내 마음 속을 말해 주는 걸까.”(1970년 1월 8일)
“새벽부터 비가 왔나보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란다.”(1971년 6월 16일)
지기지우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것으로 유명한 1970년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 1960년대 이후 작품 22점을 선보인다. 관람료 3000∼5000원. 02-2287-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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