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된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 뿌린 사랑의 씨앗은 13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환하게 밝히는 큰 등불로 성장했다. 동아일보DB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1885년 4월 미국 선교사 6명이 조선 정부의 허락으로 이 땅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조선이 기독교 포교를 금지한 상황에서 정부가 선교사에게 요청한 일은 조선에 필요한 서양문명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환자치료와 학교교육(이화, 배재, 언더우드 학당 등)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1904년 이후 대한제국의 운명이 기울자 기독교는 구국(救國)을 위한 인재 양성에 동참했고 1907년 전후 전국적으로 기독교 학교가 설립됐다. 성경의 한글번역이 꾸준히 추진되면서 한글의 발전에 기여했고, 성경읽기는 문맹퇴치에 기여했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겨레의 정신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집 안에만 있던 여성들이 교회에 다님으로써 여성인권의식, 남녀평등, 여성의 사회활동에 문이 열렸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후 교회는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정치적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전국의 교회가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는 1920, 30년대 민족의 경제적 독립에 기여하기 위해 물산장려운동(상공업 진흥, 자급자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교회의 관점에서 이 시기 우리나라의 3대 질병은 한센씨 병과 결핵, ‘화류병’이었다. 이를 퇴치하기 위해 교회는 부산, 대구, 여수에 있는 나환자병원을 지원했다. 일제의 퇴폐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와 술, 담배, 아편, 공창(公娼) 등이 사회적 문젯거리로 부상했는데, 각 교단들은 절제운동으로 맞서며 금주, 금연, 아편 금지, 그리고 공창 폐지를 위해 적극 노력했다.
1945년 광복의 감격도 잠시, 대한민국은 6·25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맞게 됐다. 우리 민족뿐 아니라 교회의 허리도 잘리게 된 것. 전후 교회는 전쟁 통에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무료 급식에 나서는 등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0년대 이래로 한국은 산업화를 통해 국가경제의 비약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고 전국의 인구가 도시로 집중됐다. 이는 도시 교회의 물량적 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반면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늘면서 한국 교회는 산업선교를 통해 이들을 품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대회에는 110만 명이 몰려 이른바 물량적 교회 부흥이 본격화되었다.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 열린 ‘엑스플로74’에도 대회 기간 총 600만 명이 참여했다. 일각에서는 대규모 전도대회들이 양적 성장에 집착하는 한국 교회의 잘못된 뿌리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두 대회를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주류 종단의 하나로 자리 잡는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하다.
1984년 한국교회100주년기념 선교대회가 열려 교회 연합과 일치의 계기가 됐다. 2013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부산총회가 개최됐다.
한국 기독교의 130년을 되돌아보면, 19세기 후반 세계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서로 충돌하며 힘겨루기를 하고 그 틈바구니에 낀 조선이 위태로움에 처했을 때 교회 역사가 시작됐다. 그 이후,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 남북 분단과 6·25전쟁, 민족 분단의 고착, 그리고 산업화 시대를 지나오며 오늘날까지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양면적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국내에서는 추락한 사회 신뢰도 회복과 저출산 시대의 새로운 교회부흥을 모색하고 있고, 해외에서는 한국 교회의 리더십을 기대하는 전 세계 교회의 요청에 부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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