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룡(李希龍)은 말 타기와 활쏘기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따라 의주(義州)에 가 있다가 영남의 적병을 정찰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 적들은 영호남에 걸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공은 적병을 피해 몰래 경주, 울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적의 허실과 형세를 알아냈다. 임금에게 보고하려고 충주(忠州)에 이르렀는데 그만 적과 마주쳐 갈 수 없게 되었다. 공은 “왕명을 받든 몸이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나아가 적과 싸워 죽음으로써 임금께 알리리라” 하고는 마침내 혼자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공의 아들 이문진(李文軫)이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길을 떠났다. 충주에 가서 공의 시신을 찾다가 신녕(新寧)에 이르러 적들에게 막히고 말았다. 이에 분연히 말하기를 “나는 이 도적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달려들어 힘껏 싸우다가 적들에게 맞아 죽었다.
이문진의 아내 김씨가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하였다. “시아버님은 나라에 충성하다 돌아가셨고, 남편은 효도하다 죽었으니 내가 죽을 곳을 알겠다(吾舅死於忠, 吾夫死於孝, 吾知死所矣). 유골을 수습해서 선산에 묻어드리고 나의 뜻을 결행하리라.” 김씨는 걸어서 적진에 이르러 들판을 두루 뒤졌다. 그런데 하필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니 시신들이 포개진 채로 비를 맞아 겉모습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손금을 보면서 찾아 헤맸는데 석 달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김씨는 여종에게 울면서 “나는 이제 죽으련다” 하더니 집으로 돌아가 곡기를 끊고 죽었다.
최천익(崔天翼·1712∼1779) 선생의 ‘농수집(農수集)’에 실린 ‘삼강비명(三綱碑銘)’입니다. 한 집안에 충·효·열(忠·孝·烈) 삼강(三綱)이 다 갖춰진, 이른바 ‘삼강 명문가’를 칭송한 글이죠. 이제 와서 무슨 철지난 삼강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랏일에 충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부 사이에 공경과 신의를 지키는 덕목만큼은 시대가 변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닙니다.
군복무를 잘 하면 ‘병역 명문가’로 선정하듯 이참에 ‘공직 명문가’도 한번 뽑아 보는 건 어떨까요? 국민을 위해 헌신했나? 청탁 행위나 부정 축재는 없었나? 군복무는? 논문 표절은? 자녀나 친인척 단속은? 사실 이런 것들이야 본인이 가장 잘 알 테니 스스로 거취를 정하면 될 일인데 남들이 나서서 따지고 삿대질해야 하는 현실이 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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