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간밤 엉망으로 취한 젊은이 하나가 동네 골목에서 고함치는 걸 보았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웩웩 토하고 나서 다시 소리 질렀다. “씨×, 다 죽어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가 ‘죽어 버릴 거야’로 잘못 발음되어 나온 그 순간이 마음 아팠다. 세상을 향하던 적의가 돌연 자기를 겨누었을 때, 숨겨 뒀던 속마음이 말실수 가운데 드러난 것 같아서였다.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을 때 인간은 차라리 자기를 해치고 싶어지는 걸까.
‘일찍이 나는’은 편하고 무난한 시들과는 달리, 자기 삶을 거의 자폭적인 붓질로 그려 낸다. 시인은 곰팡이, 오줌 자국, 시체에 불과한 것으로 제 존재를 문대 버린다. 그것들엔 온전한 생명이 없다. 그러니 살아 있다는 것은 허망한 ‘루머’에 그친다. 삶을 루머라 여기는 사람을 타인이 쉬 이해하거나 섣불리 위로하기는 어렵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아마도 그녀는 우리 삶의 실상이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거나, 저 취한 젊은이의 어두운 밤처럼 자살에 가까운 고통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힘겹게 보여 주려 하는 듯하다.
고통은 이웃처럼 찾아오지만 우리는 문을 열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걸 한사코 열어젖힌다. 시는 누군가가 저 자신을 심문하여 얻어 낸 숨은 진실에 가까운 말이다. 고통을 껴안으려 하는 건 낫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른다는 발언 속에도 행복과 사랑에 대한 소망이 들어 있을 것이다. 시인 최승자가 손쉽고 값싼 위안의 시를 거부하고, 만인의 고통을 제 것처럼 앓으며 피의 책을 써 내려간 것도 이런 맥락에서가 아닐까. 남도 나도 해치지 않아도 되는 삶. 풍문에 그치지 않는 삶. 그래서 삶이라 불러 볼 수 있는 삶…. 그런 것을 찾고 싶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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