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유학 시절, 내게 겨울 날씨는 웬만한 정신력이 아니면 이겨내기 힘들 정도의 우울함이었다. 본격적인 우기가 늦가을부터 시작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짧은 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오후 5시만 되면 이미 컴컴해진 축축한 거리에서 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서 집으로 가야 할 일만 남은 사람처럼. 그런데 이 우울함 속에서 신의 한 수처럼 따뜻함을 주는 일이 바로 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이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영국인들은 가을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크리스마스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이들이 위로 받길 원하며 기다리는 것은 단지 종교적 의미의 크리스마스만은 아니었다.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아지는 날이 12월 22일(혹은 23일) 동지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드디어 해가 길어지는 정점이 된다. 이때를 견디면 이제는 새로운 해를 맞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긴다고 할까? 영국만이 아니라 위도가 더 높아 12월이면 한낮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이 어두워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지는 더 고맙게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겨울 추위와 짧은 해를 견디며 살고 있는 푸른 잎을 지닌 상록의 식물로 거리를 장식하고 동지를 기념하는 일 년 중 가장 큰 축제를 벌였다. 크리스마스는 이 동지의 축제가 기독교와 만나면서 더 크고 화려하게 발전한 셈이기도 하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인 노르웨이 사람들은 초기에는 상록수인 전나무를 거꾸로 역삼각형이 되도록 매달아 장식했다고 전해진다. 더불어 살아 있는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목재로 피라미드 형태의 나무를 만들어 ‘파라다이스 트리’라는 이름으로 광장이나 거리에 세워두고 축제를 벌였는데 당연히 이 동지 축제의 주인공은 나무의 장식이었다. 이들이 동지라는 춥고 해가 짧은 날에 나무 축제를 열었던 이유는 상록 나무의 풍성함이 다음 해 농사를 기원해주고, 사람들에게는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무에 본격적인 장식이 시작된 것은 16세기 무렵으로 독일에서의 일이었다. 초기에는 그해 가을 수확한 열매들로 사과, 대추, 너트 등을 매달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강과자나 사탕을 걸어두는 등의 변화가 생긴다. 집 밖에 있던 나무를 지금처럼 집 안으로 들여와 장식을 한 최초의 사람은 독일의 종교 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로 본다. 그는 한밤중에 눈 쌓인 전나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나무에 걸린 하늘의 별을 보고 반짝이는 등을 나무에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겨울이 깊어지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몸은 움츠러들게 된다. 날짜로만 보면 벌써 동지를 지나가는 중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견뎌내야 할 겨울이 한참이나 남아 있음을 알기에 마음의 경직도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마음을 풀어줄 따뜻함이 꼭 필요하고, 그 따뜻함이 그 어떤 것보다 식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 크리스마스 식물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는 식물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멀리 남아메리카에서 찾아온 포인세티아를 비롯해 뿌리를 드러낸 채 공중에 매달려서 살아주는 틸란시아, 건조한 실내 환경을 좋아하는 다육식물, 기생식물로 잘 알려져 있는 겨우살이, 호랑가시나무 등은 동지를 즈음해 크리스마스 식물로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얻는다. 더불어 상록수의 나무 자체를 장식하는 방식 외에도 나뭇가지와 잎, 열매를 엮어서 동그랗게 만드는 리스로 현관문을 장식하는 것도 간단하지만 겨울의 정원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 최근에는 유럽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동양적 느낌을 가미한 독창적인 겨울 실내 정원 장식도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다양하게 시도 중이다. 누구나 간단하게 따라 할 수 있는 방법 하나 소개해 본다. 좀 굵은 나뭇가지를 준비하고 천장에 고리를 박은 뒤 와이어로 연결해 나뭇가지를 걸어준다. 그리고 이 나뭇가지에 말린 로즈메리, 방향제 역할을 해주는 모과, 공중에 매달려 살아가는 틸란시아 등을 함께 걸어 본다. 식탁 위에 설치한다면 미각을 깨워주는 향기도 함께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장식이 된다. 물론 로즈메리가 없다면 솔잎이나 솔방울 등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춥기에 따뜻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겨울이기도 하다. 따뜻함이 온도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살아주는 식물이 얼마나 그들만의 따뜻함을 나눠주고 있는지 이 겨울이 가기 전에 꼭 함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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