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2015 최고와 최악 Ⅱ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4일 03시 00분


영화 ‘타투’의 한 장면.
영화 ‘타투’의 한 장면.
※ 지난 회 ‘③최고의 대사’에서 이어집니다.

③최고의 대사=변태 청년 재벌과 청순녀의 사랑을 그린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이 중 어떤 게 당신 자동차죠?”라고 묻는 여자에게 던지는 주인공의 짧고 굵은 답변도 압권이다. “전부 다.” 이 변태 청년은 “종속되니까 자유로워지더군” “두려움은 생각에 불과해” 같은 있어 보이는 대사로 변태와 로맨스의 경계를 흩뜨리면서 순진한 처녀를 변태 세계로 포섭한다.

영화 ‘킹스맨’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와 청춘성장영화 ‘스물’의 “친구들이여, 올해도 섹스를 하지 못한다면 우린 괴물을 넘어 국회의원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 빙봉”, 산악인 엄홍길의 실화를 담은 영화 ‘히말라야’의 “저 등신 같은 자식. 여자가 산인데 왜 정복하려고 그래? 살살 달래야지”도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대사.

비장미로 가득한 무협영화 ‘협녀’는 거의 명대사 퍼레이드 수준이다. “탐을 내거라. 욕심을 가져라. 갖고 싶어 해야 하느니라. 마지막에 널 살려두는 건 바로 그 마음일 것이다” “천한 몸으로 태어난 내가 이렇게 용상에 앉아 있는 너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금 떨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네가 나의 주인인가. 내가 너의 주인인가” 등 이른바 ‘금수저’를 향해 ‘흙수저’가 품은 한과 욕망이 서릿발처럼 날리는 대사들이 그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사극 ‘사도’에도 조선시대 왕과 신하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일갈하는 명대사가 나온다. 영조(송강호)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말한다. “왕이라고 칼자루 쥐는 것도 아니고, 신하라고 칼끝 쥐는 것도 아니다. 공부 많이 해라. 실력 모자라면 왕이라도 칼끝 쥔다.”

④최고로 지루하거나 혹은 감명적이거나=
전도연 주연의 영화 ‘무뢰한’에 대해 내공 깊은 평론가는 이렇게 평했다. “생의 가장 애처로운 순간들은 결국 말로는 힘들다는 걸, 기척도 없이 온다는 걸 공기로 전하는 작품.” 그렇다. 탁월하고 졸린 영화다. 이 누아르적 영화를 보고 눈꺼풀이 내려앉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화 애호가란 소리를 들을 만하다.

다수의 국내 비평가가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았던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보고 당신이 만약 “와! 홍상수가 또 한 발짝 전진했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자타공인 영화광. “이게 뭐야? 또 똑같은 얘기만 하고 있네. 아유, 지루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냥 민간인이다. 이 밖에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진중하고 균형 잡힌 스파이극 ‘스파이 브릿지’ △미니멀리즘의 대가 다르덴 형제가 인간성 위에 군림하는 자본의 잔혹성을 통찰한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카메라로 찍은 듯한 놀라운 미학적 시도를 통해 정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이름도 어려운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신작 ‘버드맨’ 등 이른바 ‘수면제 3종 세트’를 보면서 단 한순간도 졸지 않고 오로지 밀려오는 감동만을 경험했다면 당신을 영화광을 넘어 아티스트로 인정!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을 영화로 옮긴 ‘맥베스’에 등장하는 “가끔 어둠의 하수인들은 우리를 해치려 진실을 말한다오” “오! 짙은 밤아. 칠흑 같은 어둠으로 나를 감싸서 나의 단도가 낸 상처가 보이지 않게 하라” “아! 광분을 자제의 허리띠로 졸라맬 수 없음을” 등 벽돌처럼 무거운 명대사들을 당신이 견뎌낼 수만 있다면 당신은 세상 어떤 권태로움과 무기력함도 극복해낼 슈퍼파워를 가졌으리라.

⑤최고의 시도=TV 예능프로에서 ‘삼둥이 아빠’로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영화배우로서의 매력과 가능성을 상실해가던 송일국. 그가 ‘누가 뭐래도 난 배우야’라고 증명하기라도 하듯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로 등장해 충격파를 던진 영화 ‘타투’야말로 송일국이 이미지의 전복을 꾀한, 올해 최고로 용감한 도전이었다. 송일국은 이 영화에서 무고한 여인들을 마구잡이로 강간하고 잔인무도하게 도륙하는 극악무도한 놈으로 등장해 그를 ‘국민 아빠’로 사랑해온 수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뒤통수를 갈겨 버렸다. “이런 허술하고 유치한 영화를 송일국이 선택한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대중의 반응이 압도적이었지만 특정 이미지에 매몰되기를 거부하는 송일국의 예술가적 모험과 시도는 높이 살 만하다.

⑥최악의 연기=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투’ 속 송일국의 연기는 단언컨대 역대 최악이다. 살인을 일삼으면서 “내 심장이 유일하게 뛸 때가 이때뿐인 걸 어쩌겠어”라고 그가 심드렁하게 내뱉는 대목은 숨통이 조여 오는 결정적인 순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연쇄 살인마에 대한 송일국의 해석은 관습적이다 못해 나태하게까지 느껴진다. 예능프로에서 하차하기로 한 그의 최근 결정을 환영한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킹스맨#송일국#스물#타투#맥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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