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함민복씨의 직장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8일 03시 00분


함민복씨의 직장―윤제림(1960∼)

…다음은 신랑의 직장 동료 분들 나오세요,
기념사진 촬영이 있겠습니다…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빼곡히 삼열 횡대!
나도 그 틈에 가 끼었다,
얼굴이나 나올까 걱정하면서
짧은 목을 한껏 늘였다

지상에는 일가붙이도 몇 남지 않아서
생각보다 훨씬 더 쓸쓸할 수도 있던
함씨의 늦은 결혼식에
직장 동료들이 많이 와주었다
부산에서도 오고 천안에서도 왔다
장호원에서도 왔다

오랜만에 만난 동업의 일꾼들이
늦도록 마시고 떠들며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떠난
함씨의 첫날밤을 이야기했다
여남은 명은 새벽까지 술집을 돌았고
서넛은 월요일부터 취해서 출근했다

직원이 몇이라던가,
어떤 사람은 수천 명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수만 명이라고도 하는
시인 함민복씨의 직장,

문학은 대기업이다.


시는, 직장 없는 시인의 ‘직장 동료’들을 카메라 앞에 불러 세우는 걸로 시작해서, 그들의 일터인 ‘문학’을 ‘대기업’에 빗대는 걸로 끝난다. 더러는 이 시를 쓴 분처럼 학교엘 나가고, 출판사 잡지사 다니고, 때 묻은 ‘알바’들도 하겠지만, 상당수는 무직이리라.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와 모였다. 그것은 물론 섬마을 가난뱅이 시인이 전국구 문인이자 거대 유령회사의 중견 간부라는 증거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돈벌이에 서툰 이들이 시를 쓴다. 글쟁이가 득실대는 나라는 결코 잘살지도 잘나가지도 못한다. 나라가 잘 운영되었다면 문학이 중소기업으로, 구멍가게로 쪼그라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돈 안 되는 회사의 직원이 ‘수만 명’이나 된다니, 이 지경이 되도록 나라는 뭘 한 건가. 잘나가는 건 고사하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기는 한 건가. 나라가 잘되면 시인이 줄어야 하고, 시인이 줄려면 세상이 좀 살 만해져야 하지 않나.

철인왕국(哲人王國)이 현실이 된다면, 내쫓지 않아도 시인들부터가 얼씨구나 하고 짐을 쌀 것이다. 고통과 슬픔을 버무려 작업하는 것도 지겨우니까. 하지만 21세기 한국 땅에서, 시인들이 대규모 유령회사나 차려 활개치고 있는 걸 보면, 현실은 생각보다 더 안 좋은 것 같다. 그런데도 이 시인은 잔치 분위기를 깨지 않고, 기지 넘치는 아이러니로 사태를 맵시 있게 요약한다. 중동 난민들처럼 시인들이 자꾸 국경을 넘어와 ‘대기업’ 문전에 짐을 부리는 걸 속으론 살짝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영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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