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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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크다는 것을 모르고, 산해관(山海關)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하며, 관(關) 밖의 장대(將臺)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 (중략) … 성첩(城堞)에 기대서서 눈을 사방으로 달려보니, 장성은 북쪽으로 뻗고 푸른 바다는 남쪽에 가득하며, 동쪽으로는 큰 벌판이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관(關) 안이 내려다보이니, 이 대(臺)만큼 조망이 좋은 곳은 다시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중국 관광 하면 으레 손꼽는 만리장성. 위 글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 선생이 중국에 다녀와 쓴 견문록 ‘열하일기(熱河日記)’의 한 장면인데, 만리장성에 올라가 바라본 경치와 감흥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참으로 장쾌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참 구경하다가 내려오려 하는데 누구도 먼저 내려가려는 사람이 없다. 벽돌로 쌓은 층계가 높고 험해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떨리고, 하인들이 부축하려 해도 몸을 돌릴 공간이 없으니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나는 간신히 서쪽 층계로 내려와 아직 대 위에 있는 여러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모두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대에 오를 때엔 앞만 보고 층계를 하나씩 밟고 올라갔기 때문에 위험한 줄 몰랐는데, 내려오려고 눈을 들어 아래를 한번 내려다보니 아득하여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난간도 없이 벽돌로 쌓아놓은 좁은 층계라 올라갈 땐 앞만 보고 어찌어찌 올라갔지만 내려오려니 마치 벼랑 끝에 선 듯 아득합니다. 간신히 아래로 내려온 연암 선생. 위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꽝!’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뭐든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어렵다는 진리.

벼슬살이도 이와 같다. 한창 위로 올라갈 때에는 한 계단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세라, 혹은 남을 밀어젖히면서 앞을 다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외롭고 위태로워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앞으로는 한 발짝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붙잡고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오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그렇다.(進無一步, 退有千인, 望絶攀援, 欲下不能. 千古皆然.)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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