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만의 낮잠이었다. 그 좋아하던 은행잎이 어떻게 물들어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많이 지쳐 있었다. 500년은 잔 것 같다. 일어나니 당선을 알리는 휴대전화 문자가, 떨어진 은행잎이 내게 온 것처럼 노랗게 떠 있었다.
그동안 난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내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즉 내 ‘아버지들’은 떨어진 은행잎처럼 나를 홀연히 떠나 버렸다. 조금만 더 가르쳐 주시고 가지. 아버지가 없는 나는 언제나 혼자서 그들을 공부했다. 헛발을 디뎌 넘어지기 일쑤였고, 넘어져도 혼자서 울음을 삼켜야 했다. 10여 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간신히 그들 곁에 닿을 수 있었다. 가을부터 들뢰즈를 읽었다. 우체국에서 원고를 부칠 때까지만 해도 들뢰즈를 읽으려고 화요일마다 설쳤던 그 아침 댓바람들이 글을 쓰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선이 되고 다시 글을 읽어보니 그 안에는 영화공부 하느라 애썼던 10년의 과거가 새겨져 있었다. 오롯한 내 것이란 없었다. 공부를 한다는 건, 글을 쓴다는 건 진정 나를 떠나가는 연습이어야겠다.
△1974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박사과정 재학 ▼[심사평]홍상수 영화세계를 설득력있게 논증▼
문장력과 작품에 대한 이해력, 독창적인 해석력이 기준이 됐다. 윤종빈 감독의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악역인 조윤을 의적 홍길동의 뒤집힌 버전으로 해석한 ‘망할 세상에서 만난 예기치 못한 운명’은 독창적이었다. 샘 멘디스 감독의 ‘007 스펙터’를 이 시리즈물의 전체 맥락에서 분석한 ‘살을 내주고 뼈를 가진 영화’는 전문성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를 새롭게 해석한 ‘위플래쉬, 플랫처가 아닌 앤드류를 중심으로’도 독창적이었다.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를 매체적 존재론이라는 특이한 방법론으로 해석한 ‘동시대의 매체적 존재론을 다시 쓰다’도 특색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들은 문장력의 매력이 부족했다.
세 기준을 충족시킨 평론은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대한 관객 주체적 비평 ‘날마다 새롭고 언제나 그립다’였다. 무엇보다 이 글은 잘 읽힌다. 평자는 전편과 후편으로 구성돼 반복과 차이를 드러내는 홍상수의 작품에 대해, 그런 구성이 관객 주체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낳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