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굴(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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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1월 5일 03시 00분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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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사달은 1499년 1월에 시작되었다. 사간원 정언 윤언보가 유자광을 탄핵한다.

“유자광이 함경도에 갔을 때 무리하게 전복과 굴(石花·석화)을 챙겼다. 불법으로 역마를 차출했다. 사적으로 임금에게 전복, 굴을 상납했다. 불법이다. 국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뇌물을 받은 이는 연산군이다. 즉위 5년 차,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다른 탄핵 건도 있지만 굴, 전복 불법 상납이 또렷이 나타난다.

연산군의 대답은 담담하다.

“유자광이 어찌 다른 생각을 했겠느냐? 그저 좋은 걸 보고 나한테 가져다주고 싶었겠지” 정도다. 이날의 상소는 시작에 불과했다. 사간원, 사헌부 전체가 나선다. 그해 2월 23일 결국 연산군은 유자광을 도총관의 자리에서 파면한다.

2년 후인 1501년(연산군 7년) 11월에는 한치형이 ‘역상소’를 올린다. 사간원 등의 “굴, 전복 관련 상소가 잘못되었다”는 내용이다. 한치형은 자기의 자리를 걸고 사직 의사를 밝히지만 연산군은 사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굴, 전복 사건’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6년 후인 1505년(연산군 11년) 2월, 연산군의 반격이 시작된다. 사간원, 사헌부의 “유자광의 굴, 전복 관련 탄핵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이다. 연산군은 “사간원 정언 윤은보와 사헌부 지평 권세형이 탄핵한 ‘유자광의 굴, 전복 상납’은 죄가 아니다. 그게 무슨 아첨이며 죄이겠는가? 이렇게 말할 때는 반드시 윤은보와 권세형에게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바른대로 말할 때까지 고문하라”고 지시한다. 연산군의 ‘주장’은 “유자광은 이미 나이가 많다. 나이 든 유자광이 굴 따위를 진상하여 무슨 나의 은총을 기대하겠는가? 내가 보기엔 탄핵 상소를 올린 사람들은 권력자 집안 출신들이고 유자광은 천한 집안 출신이다. 그래서 업신여긴 것”이라는 뜻이다.

6년 전의 ‘굴 상납 관련 상소문’을 문제 삼은 것이다. 두 달 뒤 의금부의 ‘판결’이 나온다. 탄핵에 앞장선 안윤덕은 곤장 80대, 처음 문제 삼았던 윤은보는 곤장 70대다.

‘유자광의 굴 상납 사건’은 정권이 바뀌면서도 계속 이어진다. 1507년 4월, 중종 즉위 2년 차. 사간원에서 다시 ‘유자광의 굴, 전복 불법 상납’을 문제 삼는다. 탄핵 내용 중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타난다. ‘호미(狐媚)’, ‘여우 눈썹’이다. 사람을 홀린다, 아첨하여 혼을 빼놓는다는 뜻이다. 사간원에서 “생복과 굴을 드려 임금을 호미했다”고 탄핵한다.

중종은 “이미 유자광이 벌을 받았으니 더 이상 재론치 말라”는 입장이고, 신하들은 강경하다. “그가 받았던 각종 상을 모두 삭제하고 중형에 처해야 한다. 자손들 역시 멀리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종은 거부한다. 결국 8년 만에 ‘유자광의 굴, 전복 상납 사건’은 마무리된다.

조선시대에는 굴을 석화로 불렀다. 굴의 모습이 마치 돌에 꽃무늬를 새긴 것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더러는 ‘石華(석화)’로 표기하기도 했다. 역시 돌에 새긴 화려한 꽃무늬라는 뜻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도 굴을 꽃 같다고 했다. “무정한 물건이 정이 있는 꽃을 피웠다. 껍질의 빛깔이 피지 않은 꽃 같다”고 했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굴은 고원(함남)과 문천(강원도)에서 나는 것이 크다. 맛은 서해에서 나는 작은 것이 낫다. ‘윤화(輪花)’는 동해에서 나는데 석화와 같다. 큰 것이 맛있다”고 했다. 충청도 해미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도 굴을 소재로 시를 남겼다. “이제 신선한 석화가 성연(서산지방)에 도착했다. 갯가 보리가 누를 때 그 맛이 뛰어나다.”

굴은 식용 혹은 약용으로도 썼다. 인조는 석화탕(石花湯)으로 목의 통증을 가라앉혔고, 선조 때의 유희춘은 “석화는 해롭지 않으나 그 성질이 차갑고 미끄럽다. 삶은 것이라도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다”는 기록을 남겼다. ‘산림경제’의 ‘굴김치’는 오늘날의 김치 못지않다. 굴에 소금을 치고 무, 파 흰 줄기를 가늘게 썰어 넣는다. 합친 다음 간이 배면 국물을 쏟아내 끓인다. 국물이 미지근해지면 건더기를 넣어서 따뜻한 곳에 둔 다음 하룻밤이 지나면 먹는다.

굴은 동양 삼국이 모두 좋아했던 식재료였다. 풍랑을 만나서 일본 쪽으로 표류했던 이들도 굴을 따 먹고 생명을 유지했다. 중국 사신들도 한반도의 굴을 찾았다. 중종 32년(1537년) 3월 조선에 온 중국 사신은 “오는 길에 늘 (맛있는) 굴을 접대하기에 한양 도성에 오면 마음껏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어찌 한양에서는 굴을 주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굴#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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