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대학 시절, 나중에 그룹 ‘동물원’의 멤버들이 될 친구들과 비디오테이프로 영화 ‘이지 라이더’를 봤습니다. 죽은 광석이네 집에서 보았죠. 특별한 이야기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미국을 미친 듯이 계속 가로질러 가다가, 주인공들이 어처구니없이 죽는 로드 무비였죠.
그런데 너무 멋있었습니다. 피터 폰다가 손목시계를 던져버리고, 부르릉거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영화의 시작부터, 우린 이 영화가 딱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죠. 우린 어디라도 대충 하루 안에 갈 수 있는 작은 나라에 사는 별 볼일 없는 천덕꾸러기들이었습니다. 오토바이도 없고, 잘생겨서 여자들이 꼬이는 쪽도 아니었죠. 하지만 우리도 틀과 요구와 기대와 억압의 무게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끝없이 거칠게 달리고 싶었습니다.
이지 라이더는 히피, 반전과 반핵, 로큰롤로 상징되는 대항문화의 대표 영화였는데, 주인공들이 타는, 팔을 벌서듯이 들어야 핸들 바를 잡을 수 있는 오토바이는 요즘엔 우리나라 도로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할리데이비슨입니다.
영화를 다 본 우린 흥분해서, 언젠가 오토바이를 타고 함께 미국을 횡단하자고 약속했습니다. 멋진 헬멧을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우리 뒤에 금발의 풍만한 아가씨들을 태우고 말이죠. 그런데 한 친구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광석이는 키가 너무 작아서 오토바이를 타면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아 넘어질 것 같으니까 안 되겠다고 말이죠. 그 말을 듣고 배꼽이 빠지게 웃으면서도, 한편 전 걱정이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제 머리통을 자비롭게 받아들여줄 헬멧이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 친구들 중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프로이트는 ‘통제하며 자아를 위해 퇴행하기(regression in the service of ego)’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이에 걸맞은 자아의 기능을 잠시 내려놓고, 아이처럼 놀며 본능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죠. 물론 이성적인 통제하에서 말입니다. 승화보다는 낮은 단계의,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충동이나 욕구를 마땅하지는 않지만 용인해주는 다른 방식으로 치환해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의 오프닝 곡을 부른 밴드 스테픈울프(Steppenwolf)는 ‘황야의 늑대’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름은 ‘The Sparrows’, 참새들이었는데, 헤르만 헤세의 동명 소설을 읽고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허세라고 공표하며 허세를 부리는 유머도, 자아에게 찰나적 만족을 주는 통제된 퇴행의 일종이지요. 만일 진심이라 믿는다면 망상이거나,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퇴행, 혹은 발달지연입니다.
다시 이들이 부른 영화 삽입곡 ‘Born to Be Wild’를 들어보니 걱정이 됩니다. 저희 아들이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건 퇴행이 아니라 그 나이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뇌의 다른 영역에 비해 안와전두엽의 발달이 지연됨으로써 나타나는 과도한 충동의 표현욕구, 흔히 말하는 중2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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