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초대장이 도착했다. 해마다 잊을 만하면 고인(故人)을 생각나게 하는 이 초대장은 마침 웰다잉(well-dying)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과 맞물려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인의 아들이 마련하는 저녁 초대였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서예가 취운 선생의 아들은 가끔 아버지가 말년에 가깝게 지낸 분들을 초대하는 자리를 만들곤 하는데 이번에는 취운 선생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20명이나 한자리에 모였다. 취운 선생은 살아 계셨을 적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밥 사주는 걸 무척 좋아하시더니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그렇게 하고 싶다는 뜻을 아들에게 남긴 모양이다.
요즘 세상에 아버지의 유지를 그렇게 성실하게 지키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니,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세심한 유언을 남긴 아버지도 참 대단하다. 5년 전 취운 선생은 부고 대신에 미리 써놓은 편지를 장례 후에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이 보내온 자상하고 긴 이별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뜻을 잘 받드는 아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고인이 아들을 ‘잘 키웠다는 것’을 보고 있는 셈이다. 사실 죽음이야말로 평생을 어떻게 살았느냐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것만큼 살아생전의 제갈공명을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이야기가 있을까. 죽은 제갈공명이 사마의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살았을 적에 지략이 뛰어났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은 삶의 모습을 반영해주는 또 다른 얼굴이다.
사는 데 급급한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잘 사는’ 문제에만 골몰한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잘 살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훗날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죽음이 무척 애석하여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남는다면 결국 그가 잘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국회에서 통과된 웰다잉법은 환자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제한적 의미지만 이를 계기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해보는 기회를 가져도 좋을 듯하다. 나를 대신하여 생전의 내 고마운 사람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해줄 자녀를 두고 세상을 뜬다면 그의 죽음은 진정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는 ‘좋은 죽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좋은 죽음’은 결국 ‘좋은 삶’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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