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원시적 세월호 참사에서 구조된 다섯 살, 권 모 어린이. 시방 가족 중에 홀로 ‘침몰’ 바깥에 앉아, 춥다. 아직 비극이란 걸 몰라 그저 놀란, 새까만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엄청 큰 바다 앞에 꽉 눌려 무표정하다. 다만 조그만 손으로 애써 젖은 양말을 벗으며, 한 가지는 대답한다. 한살 터울 오빠가 벗어준 구명조끼, 그 구명조끼만은 한사코 벗지 않는다. 봐라, 아이가 한평생 껴입어야 할 여러 벌 젖은 그림들. 저 물 위에 이미 깊이 새겨졌다.
훗날엔 자주 울고 있다.
시인은 처음의 짧은 문장에서 아이가 아직 사태를 모르기에 울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두가 봤지만 이제 많이 잊었을 그 막막한 장면의 막막한 묘사로 생각을 이어 나가서는, 역시 한 줄짜리 비문으로 시를 맺는다. 다섯 살 아이는 한 살 위의 오빠가 벗어준 구명조끼를 입고, 결국 구조되지 못한 고교생 언니 오빠들의 손길로 우선 건네져, 그 무서운 바다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아이는 정말 모를까. 그럴 리 없다. 겪었으나 이해되지 않은 그 충격은, 당장은 울음이 되지 않고 마음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즉, 사라지지 않고 보존될 것이다. 아이는 비극을 모르지만 비극을 겪었다. ‘큰 바다’에 질려 가만하지만, 구명조끼를 벗지 않으려 하며, 벌써 아프고 있다. ‘무표정’은 바로 그걸 견디는 얼굴이다. 그 위로 우리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림들’이 피어난다. 물에 새겨진 ‘암각화’는 지울 수가 없기에, 쉼 없이 되살아날 것이기에 공포스럽다.
시는 때로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훗날의 울음을 문법을 어겨 가며 기정사실로 적은 것은, 저 작은 무표정이 기실 가장 분명한 고통의 결정체이고 눈물의 덩어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고통을 잘 견디는 영혼은 없다. 견디기 힘든 것을 ‘한사코’ 견뎌내는 인간의 어떤 상태가 있을 뿐이다. 다섯 살이라고 예외이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대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나. 아이의 오빠와 아빠는 아직 물속에 있다. 아이는 괜찮을까. 아니, 우리는 괜찮을까. 앓지 않고 나을 길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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