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쌍릉(雙陵)의 대왕묘에서 1917년 출토된 유물 가운데 신라 토기와 여성 인골이 포함된 사실이 밝혀졌다. 백제 왕릉에서 신라 토기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시신이 여성인 데다 신라 토기가 나왔다는 점에서 선화공주가 묻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대왕묘의 주인이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이라는 역사학계의 통설을 뒤집는 발견이다.
국립전주박물관은 1917년 일제강점기 쌍릉 대왕묘에서 출토된 치아 4점을 분석한 결과 20∼40세 여성의 것으로 분석됐다고 26일 밝혔다. 예순을 넘겨 사망한 무왕이 대왕묘에 묻혔다고 보기는 힘든 셈이다. 학계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계획한 데다 대왕묘가 인근의 소왕묘보다 봉분이 더 크다는 이유 등으로 대왕묘는 무왕, 소왕묘는 왕비가 각각 묻힌 것으로 봤다.
치아 4점은 아래쪽 어금니 2점과 위쪽 송곳니 1점 등으로 서로 중복되지 않으면서 마모 정도가 균일해 한 사람의 치아로 분석된다. 이주헌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치아 4점 모두 목관 안에서 발견됐고 7세기 백제에는 순장 풍속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에 묻힌 사람은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박물관 측은 “석실 내 목관 앞에 놓여 있던 토기 1점을 찍은 1917년도 흑백사진을 분석한 결과 7세기 전반의 신라 토기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적갈색의 이 토기는 회백색의 편평한 백제 토기와 달리 바닥이 둥글고, 표면을 물레로 마무리한 흔적이 발견돼 신라 토기로 추정된다. 이 실장은 “백제 왕릉에서 신라 토기가 발견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라며 “제사용 토기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쌍릉 대왕묘에 묻힌 주인공이 무왕이 아니라면 과연 누굴까. 일각에서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西)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담긴 사실을 들어 사택왕후가 묻혔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백제 유력 귀족 출신인 그의 무덤에 신라 토기를 부장했다고 보기는 부자연스럽다. 더구나 일본서기 기록에 따라 서기 642년에 숨진 ‘의자왕의 어머니’를 사택왕후로 본다면 사비(부여)에 머물던 의자왕이 익산까지 와서 어머니의 묘를 조성했다고 하기는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삼국유사와 서동요를 통해 무왕과 혼인을 맺은 것으로 전해지는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가 대왕묘에 묻혔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신라인으로서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신라 토기를 무덤에 부장하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다. 앞서 지난해 4월 이병호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도 ‘백제 사비기 익산 개발 시기와 그 배경’ 논문에서 선화공주가 쌍릉에 묻혔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쌍릉이 선화공주의 묘라면 익산 천도를 계획하고 선화공주, 사택왕후와 부부의 연을 맺었던 무왕은 정작 어디에 묻혔을까. 이 실장은 “장례가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의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비에 머물던 의자왕이 능산리 고분에 아버지 무왕의 무덤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소왕묘의 주인공은 미지수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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