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청춘예찬’에 숨겨진 슬픈 창업 권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8일 03시 00분


80여 년 전 청년취업난

한 달 동안의 직업 소개 실적을 소개한 1933년 동아일보 11월 11일자 4면. 동아일보DB
한 달 동안의 직업 소개 실적을 소개한 1933년 동아일보 11월 11일자 4면. 동아일보DB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작가이자 기자인 민태원의 글이 ‘청춘예찬’이란 제목으로 월간지 ‘별건곤’에 실린 1929년 6월, 조선의 많은 청춘들은 스스로 예찬할 그 무엇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암담한 나날을 통과 중이었다. 특히 고학력자들이 그랬다. 무엇보다 취업이 문제였다.

이해 봄 최고 학부인 전문학교와 대학에서 졸업생 600명가량이 배출되었다. 절반은 일본 유학파였다.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들의 취업률은 산출이 무의미할 정도로 부진했다. ‘불과 몇 백 명 되는 졸업생에게 취직자리를 주지 못하는 것이 최근 몇 년간의 문제’라고 지적한 당시 신문의 사설이 그를 대변한다. ‘2천만 명이 활동하는 조선사회에서 몇 백 명의 신진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수긍할 수 없는 괴상한 일’이라는 개탄이었다. 1년 사이 졸업자는 두 배로 늘어났는데 취업 절벽의 상황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들을 받아줄 곳은 태부족이었다. 조선총독부와 그 산하기관에 할당된 조선인 직원 채용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큰 회사는 대개 일본 기업이어서 일본인 위주로 충원했기 때문이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공무원과 대기업의 문은 좁디좁은 것이었다. 그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유일한 한국인으로 수석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기술직으로 취직한 김해경(예명 이상) 같은 경우는 드문 예였다. 이상 같은 수재가 아니어도 최고 학부의 정상적인 졸업생 약간 명 정도는 들어가 일할 만한 직장이 있어야 정상적인 사회라 할 텐데, 변변한 일자리는 흔치 않았다.

그 10년 후 일본 유학생이 9000명을 돌파한 1939년 봄에도 취업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마다 이때가 돌아오면 아이 둔 부모는 학교 입학에 골치를 앓고, 학교를 나오는 자는 직업을 찾으려고 허덕인다.’

1927년 3월 일본 유학파 최승일이 잡지 ‘별건곤’에 기고한 ‘졸업을 하고 나서 직업을 구하기까지’라는 제목의 경험담이 12년 뒤에도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무용은 천한 일이라 여기는 부모를 설득하여 동생 최승희를 일본에 유학 보내고 오빠 최승일은 서울의 직업소개소를 전전하며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막노동자와 심부름꾼을 주로 상담하는 소개소의 직원은, 유학까지 마친 고등실업자의 이력서를 받아 들고서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직업을 구하느냐”고. 그 말이 빈정대는 듯 들려 두말도 못하고 돌아섰다는 이야기다.

1933년 3월 졸업 시즌의 기사는 여학생이 처한 형편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등 전국 17개 여학교의 금년 졸업생 115명 중 취직 희망자는 105명이다. 상급학교 진학이 6명, 가정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단 2명. 지금처럼 여자가 일할 기관이 적고 범위가 좁은 형편에서 가사과를 마친 학생 중에도 가정에 들어가려는 이는 한 사람도 없고 다들 취직을 희망한다.’

청춘예찬이 발표되기 넉 달 전인 1929년 2월에는 ‘졸업생 제군에게’라는 제목의 신문 사설이 있었다. ‘구직(求職)보다 조직(造職)’이라는 부제에 이런 요지가 담겼다. ‘활동무대가 매우 국한되어서 취직난의 비명을 듣게 된 것은 동정을 금치 못할 일이다. 취직난이 심각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의 실상이 결함 많고 경색되었음을 뜻한다. 그런 만큼 여러분의 분발과 활약할 범위가 넓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서 ‘직업을 구하는 쪽보다 직업을 창조하는 쪽에 착안하고 노력하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묻는다. ‘모든 것이 황폐하고 미비하고 부진한 환경에서 제군은 기성사회의 사무원이 되려는가 신흥문화의 개척자가 되려는가.’

청년세대가 부대끼며 인생을 시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의 인간조건일 것이다. 그런 터에 지금 어느 자치단체장처럼 청년수당 50만 원을 지급한다는 위로의 제스처를 앞세우는 것으로 난관이 해결될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태, 방치된 청춘. 민태원은 아마도 벼랑으로 몰린 느낌으로 살아가는 청춘을 동정하기보다 격려하기 위해 애써 그런 글을 짓지 않았나 싶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청춘예찬#취업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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