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신뢰의 정치입니까” 율곡, 선조를 다그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30일 03시 00분


◇율곡의 경연일기/이이 지음·오항녕 옮김/656쪽·2만9000원·너머북스

‘신뢰의 정치.’

이 책을 보고 이 문구를 한 대형 포털에서 검색해 봤다. 정치인들이 이를 언급한 횟수가 작년에만 250번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정치인들이 단골 소재로 삼은 덕이다. 고조선의 8조법이 역설적으로 당시 범죄의 횡행을 알려 주듯,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에서 신뢰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율곡 이이(1536∼1584)가 선조에게 미운털이 박혀 가며 경연(經筵)에서 부르짖은 것도 바로 신뢰였다. 왕과 신하 사이의 신뢰는 기본이고, 백성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권력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율곡은 선조가 사림(士林)들을 자주 접하고 그들의 공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제대로 관철되지 않으면 그는 임금 면전에서 “군주의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 있는 신하를 기용해 일을 맡겨야 한다”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요즘 시대에도 상사에게 꺼내기 쉽지 않을 직언을 율곡은 생살여탈권을 쥔 일국의 군주에게 서슴지 않았다.

율곡이 누군가. 불과 13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으며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하고 이조, 호조, 병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초특급 엘리트였다.

역자는 해제에서 율곡의 투철한 사명의식 이상으로 경연과 사관(史官), 언관(言官)으로 이뤄진 조선의 문치주의 시스템에 주목한다. 실제로 선조는 율곡을 불편하게 여겼지만, 대놓고 힐난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아무리 왕이라도 논리적인 지적 앞에선 힘으로 윽박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교 경전의 도덕 질서는 왕의 권력을 견제하는 중요한 논거의 틀이 됐다. 단순히 공자 왈, 맹자 왈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여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힘이 된 것이다. 역자는 “인(仁)이라는 내재적 보편 가치를 요구하는 것은 군주에 대한 집단적 협박이 담겨 있다”고 썼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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