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받아들여지지 못한 마음일수록 쉬 식지 않는다는데 흔하지만 예외 없는 사랑의 고통이 있다. 거절당한 마음에 열리는 어둠의 문을 우리 모두는 안다. 이 시는 우선 그런 상황을 노래한다. 첫 연의 ‘사랑’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이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도 사랑인데? 후자의 뜻으로 보는 편이 온당할 듯하다. 사랑의 대상은 시에 등장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아프다.
사랑의 지옥을 헤매는 마음은 두 번째 연에 그려진 대로다. 기나긴 번민으로 하여 겨울밤은 짧았을 것이다. 안개는 무심히 창밖을 떠다니고, 화자는 촛불을 밝혀 무언가 무서운 말을, 아마도 소용없어진 고백이나 사랑의 종말에 대한 다짐을 백지에 적으려 했을 것이다.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열망’은 고통스럽다. 한없는 망설임이 자주 그의 눈에서 눈물을 불러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시에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속으로 연모했던 이에게 말실수를 해서,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그 집 앞’)는 사태가 나온다. 두 시를 같이 놓고 읽어 보면, ‘사랑을 잃’은 사정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 그의 사랑은, 거절당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즉 발설되지도 못한 채로 거절당한 사랑인 것이다.
이제 모든 고뇌와 번민의 나날에 작별을 알릴 시간이 왔다. 사실은 이 순간이 시의 출발점이다. 버릴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그는 제 사랑을, 표현되지도 받아들여지지도 못했으며, 그래서 사랑이 돼보지 못한 열망을 ‘빈집’에 가둔다. 그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장님처럼’ 그는 눈을 감지만, 잃음이 가둠을 낳았다고 해서 가둠이 곧 잃음인 것은 아니다. 가둠은 사랑을 산 채로 마음의 오지에 모셔 보존하려는 눈물겨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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