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력 키워야 미술시장이 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일 03시 00분


[긴급 점검/미술계 인력시스템]<하>유명무실 학예사 자격제

지난해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학예사 자격증 신규 취득자 직무교육에서 신참 학예사들이 소장품 보존환경 관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 일 저 일 다 떠맡는 행정직처럼 여겨지는 학예사 업무를 기획, 교육, 보존처리, 대여구입 등으로 전문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지난해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학예사 자격증 신규 취득자 직무교육에서 신참 학예사들이 소장품 보존환경 관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이 일 저 일 다 떠맡는 행정직처럼 여겨지는 학예사 업무를 기획, 교육, 보존처리, 대여구입 등으로 전문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학예사(學藝士) 자격증이 업무효율, 처우, 급여에 영향을 미친다면 벌써 땄을 거다. 하지만 20년 넘게 미술전시 일을 하면서 한 번도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다. 미국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며 제출을 요구받은 건 자격증이 아니라 실습 작업 포트폴리오였다.”

익명을 요구한 40대 후반 현직 공립미술관장의 말이다. 그는 “국공립 미술관의 일부 정규직원을 제외하면 국내 미술계의 전시기획 인력시스템은 한마디로 처참한 지경”이라고 털어놓았다. 양질의 미술품을 사람들에게 매개하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데 현행 학예사 자격제도가 별 보탬이 안 된다는 얘기다.

학예사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전시기획 업무를 총괄한다. 큐레이터(curator·관리자)라고도 불리는 이 직업과 관련해 자격증 제도를 둔 나라는 일본(학예원)과 한국뿐이다. 대학 관련 학과를 졸업하면 쉽게 취득하는 일본의 학예원 자격은 미술관 채용의 중요 기준이 아니다. 반면 한국의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은 학예사 자격취득자를 1명 이상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정부등록미술관 요건을 충족하도록 규정했다.

문제는 자격시험과 실무능력의 간극이다. 응시자와 미술관 양쪽 모두 곤란을 겪는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서울 종로구의 한 대형 갤러리 학예사는 “시험은 통과했지만 솔직히 현장 의사소통과 전혀 무관한 내용의 객관식 영어시험을 왜 치르는지 의아했다”고 말했다. 한 기업부설 미술재단 소속 선임학예사는 “미술관 등록 유지를 위해 현장 감각이 부족한 자격취득자를 앉혀놔야 하니 그만큼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고 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학예사 자격시험을 주관하는 한국박물관협회 관계자는 “미술사학, 예술학, 전시기획론을 비롯한 12개 과목에서 2개를 택해 4개 문제에 답하는 논술전형의 ‘복불복’ 식 불확실성 등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답했다.

전시기획 전문 인력의 부재로 인한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비판받은 지난해 7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광복 70년 기념전’. 동아일보DB
전시기획 전문 인력의 부재로 인한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비판받은 지난해 7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광복 70년 기념전’. 동아일보DB
현장 인력들은 “실무능력과 동떨어진 자격시험의 존재 자체가 불합리한 이중고를 안긴다”고 지적했다. 사설 갤러리에서 일하다가 지난해 한 공립미술관으로 옮긴 한 30대 큐레이터는 “국공립 미술관 전시기획실에는 ‘가급적 일하지 않으려 하는 소수의 붙박이’와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다수의 떠돌이’가 양립해 있다”고 했다.

“정규직 학예사의 인사 평가에는 기획한 전시에 대한 질적 평가가 반영되지 않는다. 이른바 ‘짬밥’만 쌓이면 자동으로 학예사 등급이 올라간다. 위험 부담이 있는 실험적 기획에 굳이 도전할 까닭이 없다. 월 200만 원 미만의 보수를 받고 온갖 잡다한 단순노무를 떠맡는 계약직 학예사 역시 정성을 쏟으며 일할 동기를 찾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국공립 미술관의 법인화, 학예사 표준계약서 마련 등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정규직 학예사의 업무 평가와 계약직 학예사의 노동 보상 체계를 먼저 정비해야 전시기획의 질을 높일 인력 풀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부관장은 “한국 미술시장이 최근 10년 새 홍콩에 역전당한 데는 전시기획 인력이 부족한 탓이 컸다. 작가들만 고군분투하는 형국이 안타깝다”고 했다.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1실장은 “글로벌 미술계의 급변에 발맞춰 기존 학예 인력이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기회도 제공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학예사#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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