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간신히 늙어버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1일 03시 00분


설 연휴 직전인 지난주 금요일에 내가 좋아하는 서정춘 시인의 시 ‘30년 전-1959년 겨울’을 신문에서 읽었다. 고향을 떠나는 어리고, 배고픈 자식에게 아버지가 ‘배불리 먹고 사는 곳/그곳이 고향이란다’라고 일러 주는 구절은 가난했던 그 시절을 함축해 주는 것 같아서 읽을 때마다 가슴 저린다.

나는 1959년의 겨울은 알 수 없지만 이 시를 읽으면 시골에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상경하던 1970년대의 풍경이 떠오른다.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 덜기 위해서라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어리고 배고픈 자식들이 서울로 올라와 고군분투하다가 명절 고향 가는 길은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배불리 먹고 사는 곳이 고향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고향 가는 기차표를 사려고 밤새워 줄을 서면서 ‘귀성전쟁’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눈물겹던 그 시절이 지나고 어느덧 고향 가는 길은 자가용 행렬로 바뀌었다. 특히 올 설 연휴 기간 인천공항 이용객이 사상 최다였을 만큼 배불리 먹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

두 달 전쯤 서정춘 시인의 시화전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첫사랑’이란 시를 보았다.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순금이 이빨로 깨뜨려준 눈깔사탕/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 안에/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시인에게 ‘간신히 늙어버린’이란 구절이 눈물난다고 했더니 그는 “‘간신히’라는 표현을 간신히 생각해 냈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설날에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시 이 시가 생각났다. 한세상 살아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아는 나이에 이르러서인지 ‘간신히’라는 말이 참으로 실감난다. 예전에는 나 자신에게조차 “그렇게밖에 못 사니”라고 쉽게 힐난했지만 이젠 모두에게 “이 험한 세상에서 사느라고 참 애썼다”는 위로를 해 주고 싶다.

만날 때마다 주름살이 늘어 가는 형제들, 어느새 장성한 조카들, 이 세상에 없는 엄마, 그래서 더 외로운 아버지. 시간은 제자리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설령 엄청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해도 다음 명절에 또 고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가족은 나의 첫사랑이자 또한 마지막 사랑이기 때문이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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