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입에 넣었던 음식을 뱉었다? 영조 47년(1771년) 6월 29일(음력) 아침의 일이다. “오늘은 선의왕후의 제사다. 아침상에 육찬(肉饌)이 있었는데, 눈이 침침해서 분간하지 못하고 집어먹었다가 깨닫고서 토했다.” 영조의 나이 78세, 돌아가시기 5년 전이다. 선의왕후는 이복형 경종의 비(妃)다. 영조에게는 이복형수. 간단한 내용인데 의미가 깊다.
선의왕후 어 씨는 1730년(영조 6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영조와 선의왕후는 좋은 관계일 수가 없었다. 영조는 집권 내내 이복형 경종의 독살설에 시달렸다. 선의왕후는 영조의 즉위를 반대했고, ‘영조 암살미수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런데 제삿날은 지극히 감성적이다. 왜일까? 영조의 ‘보여주기 쇼’일 가능성이 있다.
육선(肉饍), 육찬은 고기반찬, 좋은 반찬이다. 조선의 국왕들은 가뭄 홍수 장마 추위 등 자연재해나 왕실의 초상, 제사가 있을 경우 좋은 반찬인 육선을 피했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는 국왕의 부덕 탓”이다. 왕실의 어른이 돌아가셔도 ‘잘 모시지 못한 죄인’이다. 영조가 죽은 형수를 그리워하며(?) ‘고기반찬을 뱉은 것’은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위한 ‘쇼’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성종 즉위년(1469년) 12월 28일에는 할머니 대왕대비(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 씨)의 육선을 두고 소동이 일어난다. 예종이 죽은 지 한 달 되는 날. 신숙주 한명회를 비롯한 원로대신들이 대왕대비의 육선을 권한다. 대비 윤 씨의 대답은 “불가”였다. 대신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성종도 부추긴다. 서너 번 이야기가 오가다가 마침내 대비 윤 씨가 ‘폭탄선언’을 한다.
“육선 강요를 그치지 않는다면 나는 짧은 머리털마저 깎고 정업원(淨業院)으로 물러가겠다.”(‘성종실록’) 정업원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가 단종 사후 살던 곳이다. 왕실 여인들은 이곳을 사찰처럼 여겼다. 유학자들에게 ‘대비의 사찰행’은 끔찍한 일이다. 더하여 정희왕후는 단종을 죽인 세조의 비다.
이 기록의 끝부분에는 ‘신숙주 등이 그제야 물러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끝은 아니다. 다음 날 29일 성종이 원로대신들에게 “왜 대왕대비전에 육선 드시기를 연달아 청하지 않는가”라고 재촉한다. 30일에는 신숙주 등이 먼저 대왕대비전에 육선을 권하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이번엔 성종이 “간곡히 청해도 윤허를 얻을 수 없으니 번거롭게 다시 아뢰지 말라”고 말린다. 며칠 후인 1470년 1월 5일에는 신숙주 등이 “(육선을 금하는 일이) 이미 예법의 한계도 지나쳤다”고 지적(?)한다. 대왕대비의 대답은 여전히 불가. “비록 내가 예법을 지나쳤더라도 뒷날 누가 나를 따라하겠는가? 염려하지 마라”는 것이다. 드디어 같은 달 18일 대왕대비전과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 육선을 올렸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성종도 즉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예종의 아들과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국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궁중 원로와 어른들이 많았다. 할머니 정희왕후, 친모 소혜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가 모두 살아 있었다. 게다가 즉위 초기는 정희왕후와 소혜왕후의 대리청정 체제였다. 궁중 안팎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했다. 처신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의 고기반찬 금지, 감선(減膳)은 차라리 신선하다. 세종 4년(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6개월 후인 11월 1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의 감선을 두고 긴 대화가 오간다. 기록을 보면 실제 세종의 건강 상태는 심각했다. 오랫동안 감선을 하니 ‘허손병(虛損病)’이 왔다고 한다. 허손병은 ‘허로’라고도 하는데 ‘기가 허하다’는 뜻이다. 폐결핵으로 보는 이도 있다. 영양실조 상태의 세종이 감선을 고집하자 신하들이 결정타를 날린다. 태종의 유언이다. “주상(세종)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 ‘권도’란 ‘적당히’ ‘알아서’ ‘유연성 있게’라는 뜻이다. ‘효자 세종’은 고기반찬 올리는 일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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