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진정벌은 방어戰? 세력확대 위한 토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0일 03시 00분


◇전란으로 읽는 조선/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음/324쪽·1만9800원·글항아리
명나라와 사대관계 유지하던 조선, 국익 위해 교묘한 외교전략 펼쳐…
조선 전란의 실상 상세히 담아

조선 시대 17세기 그림인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세조 때 신숙주가 함길도에서 여진족을 정벌하는 장면을 그렸다. 한밤중 여진족의 습격에도 신숙주가 동요하지 않고 막사에서 누운 채 적군을 걱정하는 시를 읊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조선 시대 17세기 그림인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세조 때 신숙주가 함길도에서 여진족을 정벌하는 장면을 그렸다. 한밤중 여진족의 습격에도 신숙주가 동요하지 않고 막사에서 누운 채 적군을 걱정하는 시를 읊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최근 취재 중 만난 중국 교수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들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중국 정부에 추가 핵실험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4차 핵실험을 기습적으로 벌인 뒤 북측이 외교 관계자를 중국에 보내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국제역학 구도상 중국이 결코 자신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한 북한의 기만전술일 수도 있다. 이 교수는 “북한이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의 갈등관계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전쟁과 내란의 역사를 담은 이 책을 읽는 동안 현재의 동북아 정세가 겹쳐 보였다. 특히 조선 초기 세종과 세조가 북벌을 추진하면서 대국 명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 전략도 교묘한 측면이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자리 잡은 여진족에 대한 세력 확대는 조선과 명나라가 동시에 추구한 외교 목표였다. 자연스레 양국 사이의 갈등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국 초부터 명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강조한 조선이지만, 실질적인 국익 추구는 별개의 문제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433년 4월 세종의 압록강 일대 여진족 정벌이다. 조선은 바로 직전 해 12월 여진족 기마부대 400여 기가 평북 지역을 공격한 데 대한 대응임을 명나라에 알렸다. 그런데 출병 날짜를 개전 1주일 전에야 명나라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명나라가 지정한 위소(衛所·군사행정구역)에 대한 군사활동을 전개하면서도 조선이 사전 허락을 받을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당시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1만5000명의 대군을 동원한 것도 단순한 방어전 성격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이다. 사전에 여진 세력에 대한 정벌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신숙주는 정벌군을 출동시키면서 명나라 사신이 부른 여진족 추장 90여 명을 모두 잡아 죽이기도 했다.

세종, 세조를 비롯해 성종, 연산군, 중종, 명종 등도 대외 영향력 확대와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정벌을 꾸준히 추진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4군 6진을 개척해 북방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은 조선시대 내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틀을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조선 초기인 1467년(세조 13년) 5월 함길도에서 발생한 ‘이시애의 난’에 대한 논고가 그렇다. 저자는 이시애의 난에 대해 지방세력과 중앙관료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무곡(貿穀·다른 지역에서 들여와 판매하는 곡식)과 호패법 시행에 따른 경제적 요인에서도 원인을 찾고 있다.

한명회와 신숙주 등 당시 권력가들이 무곡을 통해 곡식이 귀한 함길도에서 큰돈을 벌면서 이 지역 토호들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양인들을 찾아내 군역을 지우는 호패법 시행도 가별치(투항한 여진족)를 노비처럼 부린 지방 세력에 부담이 됐다. 결국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조정은 이시애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호패법 시행을 유예하는 방식으로 토호들을 달랬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란으로 읽는 조선#여진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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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많은 댓글

  • 2016-02-20 19:54:23

    조선에 노비가 도망을 하면 산속으로 들어 가고 백두 대간을 통해 만주까지 갈수 있고 만주를 넘어선바로 몽고 고원이다. 몽고고원에서 말을 타고 3일만 달리면 동유럽에 도달 한다. 이것이 한민족 역사인 것이다. 말갈족의 후손인 헝거리 돌궐족 후손인 터어키는 한국을 형제국이

  • 2016-02-20 19:57:29

    여진족에 주요 근거지는 인구 분포상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평안도와 함경도 이다.조선의 땅인 간도.. 간도도 만주족에 땅이 아니라 조선의 땅인 것이다. 누루하치는 조선 천민 출신 반란군이다.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본인 역시 신라계 조선인이라는뜻 누루하치이다.

  • 2016-02-20 19:51:24

    여진족은 본래 조선의 속국으로 여진족의 역사 역시 한민족 역사 이다.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정벌 하고 한족에게 행한 변발 풍습은 조선에 강요하지 않았고 조선은 멸망시키지 않았다. 당지 조선의 왕이 조선 천민 출신인 누르하치에게 항복 햇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기록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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