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 최정화 씨(37)의 첫 소설집이다. 등단 당시 ‘개인의 불안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세계의 불안과 마주한다’는 평을 받았다. 실제로 이 소설집에 실린 10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연령도, 성별도 다르고 거주하는 공간도 다르지만 이들에게 깃들인 불안의 색깔은 같다.
소설집의 제목은 단편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에서 따왔다.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여름 한철 시골에서 집을 구해 작품을 쓰는 소설가 오난영과 집주인 미옥의 이야기다. 미옥은 소설가에게 열렬한 호기심을 갖고 다가가지만 오난영은 경계심을 풀지 않는다. 파지를 몰래 읽는 미옥을 우연히 만난 뒤 작가는 미옥에게 작품을 읽히고 평을 들으면서 가까워진다. 어느덧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선망과 열등의식을 함께 갖게 된 미옥이 뒤틀린 마음에 위악적인 소설 평을 하면서 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다. 들뜬 마음-친밀감-자책-집착에 이르는 미옥의 심정을 작가는 섬세하게 해부한다. 오난영의 출간기념회에 참가한 미옥이 한 손엔 종이칼을, 한 손엔 새 책을 든 채 ‘내가 무엇을 내밀지 당신에게 달려 있다’면서 마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애잔하다.
단편 ‘홍로’에선 계약으로 맺어진 연인 관계를 연기하는 남녀가, ‘구두’에선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러온 여성과 집주인이 등장한다. ‘홍로’에서 남자는 평소 아내 역할을 해오던 50대 여성 이용순을 막상 친구들에게 보이려고 하자 답답해진다. 촌스러워서다. 남자의 친구들 앞에서 처음엔 쩔쩔매던 이용순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할에 몸을 맞춰가면서 대담해진다. 이제 마음을 졸이는 것은 남자다. 이렇듯 처해진 상황도, 속한 계층도 다르지만 작가가 인간관계의 팽팽한 긴장감을 묘사하는 방식은 섬세하다. 평론가 강경석 씨는 누적되는 사회적 피로감을 언급하며 “이만 한 실감으로 피로감을 전해주는 작가는 많지 않다”고 최 씨 작품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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