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갤러리의 안내책자는 종종, 도저히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역겨워서다.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독일 저널리스트인 이 책의 저자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하다. 베를린 한 전시실 벽면의 홍보문구 ‘모든 이벤트는 담론이다’에 대해 “교태 어린 작당의 언동”이라 꼬집은 그는 뒤이어 은박지 조각으로 얽은 설치작품의 안내문을 인용했다.
“이 설치물은 마법과 평행세계에 대해 새로운 수준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추상의 내부에 메마른 풍경이 만개해 있다. 명백한 구두법(句讀法·문장부호표기법)으로 알레고리(풍자)적 지시 관계를 풍성하게 묘사했다. 정서적으로 분리된 유년기, 정신분석, 꿈,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 등 섬뜩하고 으스스한 무언가를 암시한다.”
옮겨 적기조차 민망한 이 글에 대해 지은이는 “언어 껍데기 이면의 어리석음과 오만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진다”고 썼다. ‘좋지 않은 콘텐츠에 대한 비판을 굳이 기사로 낼 까닭이 없다’는 지적을 수없이 받은 기자로서 “조심스럽게 표현한 미사여구의 공허한 껍데기 비평만 득실거린다”는 본문의 토로는 적잖이 후련하다.
“1975년 미국 저널리스트 톰 울프가 저서 ‘현대미술의 상실’에서 미술시장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똑같다. 소수의 판단으로 ‘가치가 커 보이는 미술’이 결정되고, 대중은 그 ‘정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일 뿐이다. 도대체 ‘우리 시대의 대단히 중요한 작가’가 왜 이리도 많은 걸까? 그 의미와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 건가?”
직역한 원제는 ‘미술을 증오한다: 실망스러운 사랑’. 출판사 담당자는 “원제를 그대로 살리고 싶었지만 여러 논의 끝에 변경됐다”며 아쉬워했다. 글쓴이의 속내는 직역을 살린 각 장 소제목을 통해 보다 뚜렷이 짐작할 수 있다. ‘클리셰(상투적 표현)를 늘어놓고 돈벌이에 골몰하는’, ‘돈의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무분별하게 이상화된 천재의 광기를 찬미하는, 미술을 증오한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전시실 안내책자만큼이나 읽기가 수월찮다. 출판사는 영어 번역본이 없다고 밝혔다. 독일어에 능숙하다면 원서를 구해 함께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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