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프랑스 미술계에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성 일색의 왕립 미술아카데미가 여성 회원 3명을 선발했지요. 미술가로 장래가 보장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이유로 절대 권위의 미술기관 발탁 절차는 준비가 버겁고,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오늘날 대학 입시처럼요.
아델라이드 라비유기아르(1749∼1803)는 신입 여성 셋 중 하나였습니다. 서른넷에 화가로 공식 인정을 받은 후 초상화로 두각을 나타냈지요. 색감은 풍성했고, 마무리는 섬세했습니다. 왕족과 귀족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아갈 즈음은 계몽과 변혁의 시기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습니다. 하지만 미술가의 삶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예술의 기조를 맞춰 나갔거든요. 혁명기 화가의 그림에서 구체제 인사들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대신 혁명가가 화폭에 등장했습니다. 혁명 이후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높은 시대의 파고를 현실에서 넘으며 예술적 평판을 안정적으로 유지했습니다.
‘두 제자와 함께 있는 자화상’에 그녀가 있습니다. 미술도구를 든 순간을 선택했군요. 차림은 깃털 모자를 갖춘 새틴 드레스입니다. 작업 의자도 값비싸 보입니다. 실제로 이런 과한 차림으로 호사스러운 공간에서 작업했던 걸까요.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넉넉한 재정 상태와 환상적 작업 조건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부유한 남편과 일찍 이혼했지만 재정적 곤궁함은 없었습니다. 사설 미술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삶의 윤택함을 이어갔어요. 남성 위주의 전시 관행을 비판했던 그녀였습니다. 여성 미술가의 전시 기회 확대를 요구하기도 했지요. 특히 여성 후배 양성에 힘을 쏟았답니다. 단순한 화가를 넘어 힘 있는 미술계 인사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화가의 자화상에는 등장인물이 둘 더 있습니다. 스승과 그의 예술에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제자들입니다.
추운 계절의 끝에서 고교들의 대입 결과를 접할 기회가 잦습니다. 합격자 수가 해당 학교의 진가처럼 비칩니다. 이런 통계들에 그림 속 들러리 제자들을 겹쳐 봅니다. 라비유기아르는 당대 미술 지형에서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두 명의 제자는 스승의 존재와 가치를 부각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의 복합적 맥락 평가를 위한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수학과 거리가 멀었던 탓일까요. 합격자 수치로 교육의 가치를 어림잡는 세상의 계산법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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