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수 씨는 오래전 백남준 작가와의 대화를 회고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다다익선’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줘 고맙다고 하더라. ‘그 작품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미술관은 한 유명 작가의 전용 기념관일 수 없다. 여러 작가들이 정당한 권리로 그 공간의 다른 가능성을 실험할 때 비로소 설계자의 의도가 확인될거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시공 중에 정부 고위 관료가 시찰을 나와 ‘돌담 위에 기와지붕을 얹어 돌리라’고 지시했다. ‘공간계획의 큰 그림과 어울리지 않아 곤란하다’고 반박했더니 어찌나 노발대발하던지. 내 의지는 관철됐지만 그런 일이 거듭 되면서 공사가 하염없이 길어졌다.” 198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설계한 건축가 김태수 씨(80)의 말이다. 그는 6월 6일까지 이곳에서 열리는 국현 과천관 이전 30년 기념 ‘김태수’전 개막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 서울대 대학원(건축공학 석사)을 졸업하고 25세 때 미국 예일대로 유학을 떠난 김 씨는 이후 줄곧 미국에서 생활했다. 19일 오후 만난 그는 “한국에서 일하는 건축가였다면 돌담 위는 물론이고 미술관 건물 지붕에도 기와를 올려야 했을 것”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
“설계안 프레젠테이션 때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팔각기와지붕을 얹으라고 했다. 일단 ‘고려해 보겠다’고 답했지만 다음 보고 때까지 아무 준비도 안 했다. 그 낌새를 챘는지 장관이 단둘이 얘기하자며 나만 따로 불러 설명을 들었다. 자문위원회의에서도 한 서울대 교수의 조명 관련 지적을 듣고 사전조사 데이터를 제시했다가 ‘학교 선배에게 불손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저녁에 그 교수에게 전화로 사과했다. 일을 진행해야 했으니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경. 정부 관료들의 구태의연한 지적에 설계자가 굴복했다면 깔끔한 원뿔지붕 대신 팔각기와지붕이 얹어졌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한국적인 기와지붕’의 강요를 피해낸 국현 과천관은 “청계산 자락 풍광과 산세의 익숙한 아름다움을 세련되게 잡아냈다”(김광수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공간을 이렇게 다루면 예술이 된다는 걸 일깨워주는 건물”(서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이라는 호평을 얻으며 서울관 건립 전까지 27년간 국현의 중추 공간 역할을 했다.
“듬성듬성 바위 속살을 드러낸 한국 산의 이미지도 끌어들이고 싶었다. 흔하고 저렴한 화강암을 외장재로 쓰겠다고 하니 ‘대기업 사옥에 쓰는 이탈리아제 석판을 사용하라’는 답이 왔다. 화강석 벽재 샘플을 만들어 보여주고 겨우 동의를 얻었다. 커다란 공공건물을 국산 화강석 외장으로 마감한 첫 사례였다. 그 뒤 많은 건물이 뒤따라 이 재료를 썼다.”
미국건축가협회상 수상작인 미들버리 초등학교 실외 이동로. 건물 전체를 가로지르며 교실, 도서관, 체육관을 척수처럼 잇는 점이공간이다. 아래 사진은 구상 스케치. 출처 tskp.com이번 전시는 미국건축가협회상 수상작인 미들버리 초등학교(1982년)를 비롯해 하트퍼드대 문화센터(1987년), 튀니지 미국대사관(2002년), 국현 과천관 등 김 씨가 설계한 대표적인 프로젝트 23개의 스케치, 도면, 모형을 선보인다. 구상 단계 스케치의 디테일이 완공된 건물을 보며 그린 듯 섬세하다. 그는 “공간 이미지를 스케치로 구체화하면서 구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손 스케치를 거치지 않은 컴퓨터그래픽의 한계는, 모든 구상을 ‘그럴싸한 이미지’로 둔갑시킨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자기 경험과 그것을 통해 구축한 감성을 기반 삼아 살아간다. 예일대 재학 때 나는 다른 학생들 것에 비해 내 설계안의 비주얼이 화려하지 않아 보여 늘 창피했다. 어느 날 작정하고 화려한 조형성을 강조한 모델을 만들었더니 지도교수인 폴 루돌프가 꾸짖었다. ‘그동안 잘해오더니 뭐냐 이게! 네가 네 안에 가진 걸 믿어야지!’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았다.”
김 씨는 건축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약은 계산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했다.
“예일대 후배라고 작년에 찾아와 인사한 학생을 얼마 전 다시 만났다. 올해부터 경영대 수업을 듣는다더라. 건축은 미쳐도(crazy) 미치기(reach) 어려운 일이다. 젊을 때부터 안전망을 만들려 하면 그 그물에 스스로 걸려 붙들린다. 건축도 삶도, ‘큰 그림’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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