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 “때가 되면 나라 위해 생명 바칠 수 있어야” 특별 연성수련
천도교, 개신교·불교와 연대해 3·1운동 준비에 혼신의 노력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 당시 3·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가 국내 7대 종단과 함께 당시의 정신을 되새기고 현재의 실천으로 이어가는 기념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천도교 측은 범종교적, 범민족적 차원에서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겠다는 취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를 통해 3·1운동의 학술적 재조명을 비롯해 비무장지대(DMZ)의 영구평화지대(PPZ)로의 전환, 종교평화센터의 건립 등에 나설 예정이다. 26일에는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종교와 시민단체 인사들을 초청해 앞으로의 활동 계획과 의미를 밝힐 예정이다. 또 앞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기 위해 추진위에 공동대표 33인과 민족대표 발기인단 333명도 구성할 예정이다.
“10년 안에 국권 회복을 하겠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를 당하자 천도교 3대 교조(敎祖)인 의암 손병희는 이렇게 다짐하고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손병희는 우선 천도교 기관지를 발행하는 ‘천도교회월보사’를 통해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강제 병합을 성토하는 성명서를 비밀리에 보냈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돼 체포됐다. 이후 일제는 동학혁명 등으로 배일(排日) 사상이 농후한 천도교를 철저히 경계하기 시작했다.
손병희는 전국의 교역자들에게 독립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전국의 고위 교역자 483명을 49일씩 7회에 걸쳐 “때가 되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며 특별 연성수련을 시행했다. 3·1운동 당시 전국 조직망을 가동해 일제히 궐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봉황각 연성수련에서 비롯됐고 실제로 이들이 당시 전국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또 1911년에는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전개했고 1912년 7월 15일에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을 개최하기 위해 취지문 건의문 행동강령 등을 작성하다가 일제에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고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전국의 교인들에게 중앙대교당을 건립한다는 명목으로 성금 모금을 전개했다. 당시 천도교는 1900만 인구 중에 300만의 교인을 가진 대규모 종단이었다. 당시 모인 자금은 100만 원(현 가치로 1000억 원으로 추정)이었으며, 이 중 27만 원은 1918년 중앙대교당 설립 자금으로 썼지만 나머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돈은 훗날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자금, 만주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지원되기도 했다.
천도교는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내적으로 조직을 강화하고 독립자금을 마련했으며 이웃 종교인 불교 개신교계와의 연대를 도모했다. 천도교는 불교 용성 스님과 만해 스님을 주축으로 한 불교계, 장로교 감리교단을 아우른 개신교계와 독립선언을 함께 하는 데 합의했다.
천도교는 독립선언서를 비롯해 건의서, 청원서 작성 및 선언서 인쇄를 담당했다. 이에 천도교단은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 등에 보내는 독립통고문,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新文館)에서 조판한 후 천도교의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해 천도교 전국조직망 등을 가동하여 전국에 배포됐다.
이처럼 3·1운동은 손병희의 지도 아래 천도교 참모진의 기획과 천도교 전국교구 조직망이 가동되었으며 자금까지 전담하는 등 천도교 측이 총력을 기울였다. 개신교계는 국제 네트워크를 활용해 파리강화회의 등에서 3·1운동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국제적 지원을 확보하려 했으며 불교계는 지역 사찰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박남수 천도교 교령은 “기미독립선언서는 생명평화, 화해상생, 인류공영의 비전을 담은 민족헌장으로 이 정신을 오늘에 다시 밝힐 필요가 있다”며 “특히 천도교 불교 개신교 등의 종교가 한마음으로 3·1운동을 이끈 정신을 기려 종교계, 정관계, 시민사회단체, 학생 등을 하나로 묶는 3·1운동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데 천도교가 허브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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