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00년 이전에 지은 ‘태일생수(太一生水)’란 문헌을 보면 생성과 순환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잘 표현해주고 있어요. ‘음(陰)과 양(陽)은 서로 도와 사시(四時·사계절)를 이루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은 서로 도와 차가움과 더움을 이루고, 차가움과 더움은 다시 서로 도와 습함과 건조함을 이루고, 습함과 건조함은 다시 서로 도와 한 해(歲)를 이룸으로써 멈춘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차가움과 더움, 습함과 건조함을 자연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현대적 개념으로 차가움과 더움은 온도의 문제이고, 습함과 건조함은 습도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온도와 습도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요소지요. 식물을 키우는 농사법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독특한 농사 철학을 갖고 있는 농부 이훈규 씨(59·이온종묘 대표)의 말이다. 자연물은 오로지 사계절의 춥고 따뜻하고 건조하고 축축한 성질에 따라 성장과 멈춤을 반복하므로, 그에 맞춰 농사를 지으면 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식물도 사계절의 한난조습(寒暖燥濕)의 4가지 특성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대표는 이를 실험을 통해 처음 밝혀낸 인물이기도 하다.
“식물에 대해 수많은 임상 실험을 한 결과 식물의 기질과 환경은 서로 반대가 돼야 잘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20℃(기준)의 비교적 차가운 환경에서 잘 자라는 ‘열성기질’의 식물과 30℃(기준)의 비교적 무더운 환경에서 잘 자라는 ‘냉성기질’의 식물이 따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5℃(기준)에서 습도가 낮은 곳에서 잘 자라는 ‘습성기질’의 식물과 온도 25℃(기준)에서 습도가 높은 환경에서 잘 자라는 ‘조성기질’ 식물도 있고요.”
● 사상체질의학을 바탕으로 한 오행농법
그의 설명을 듣노라니 사람을 네 가지 체질로 분류해서 유명한 조선 말기 의학자 이제마(1837~1899)의 체질의학이 머리에 떠올랐다. 목·화·토·금·수라는 오행 이론을 바탕으로 사람을 4가지 체질(태양인·태음인·소양인·소음인)로 구분한 이제마의 이론과 그의 식물 분류 이론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동양의 음양오행 이론을 사람에게 적용한 학문으로는 사주팔자를 풀이하는 명리학(命理學)과 이제마의 체질의학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명리학 고수를 찾아 취미 삼아 사주팔자론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체질의학에도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의학계에서는 체질의학 이론을 치료에 적용하면서도 그 이론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연구는 눈에 띄지 않더군요. 저는 농부이다 보니 체질의학에서 체질에 따라 달리 처방하는 식물군을 채집해 직접 키우면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체질 분류 이론이 식물분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걸 찾아낸 거지요.”
이 대표는 담담하게 표현했으나 그의 말은 결코 담담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제마는 한 해에 한난조습의 4가지 특징이 드러나는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사람 체질도 여름인(소양인), 겨울인(소음인), 봄인(태양인), 가을인(태음인)으로 분류하고 그 원리를 설명했지만 체질별로 처방하는 약재를 분류하는 기준은 제시하지 않았다. 즉 어떤 약재가 무슨 이유로 특정 체질에 좋은지를 객관적,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표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체질별로 도움이 되는 식물 분류의 툴(도구)을 개발해낸 것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보리, 쑥갓, 시금치, 미나리, 부추 같은 열성기질 식물은 20℃ 이하의 차가운 환경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몸이 찬 소음인(겨울인)과 궁합이 잘 맞는다. 인삼 역시 광합성 최적온도가 15℃로 열성기질 식물이기 때문에 소음인이 먹을 경우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명약이 된다. 마찬가지 원리로 상추, 오이, 토마토, 고추, 수박, 참외 등은 30℃ 이상의 고온에서 잘 자라는 냉성기질 식물이어서 몸이 뜨거운 소양인에게 좋다. 체질이 건조한 태양인(봄인)은 25℃ 정도의 건조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습성기질 식물인 메밀, 포도와 궁합이 잘 맞으며, 체질이 습한 태음인(가을인)의 경우 25℃ 정도의 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조성기질 식물인 무와 찰떡궁합이다.
“결론적으로 이제마 선생이 사상의학 처방에 사용한 약재는 식물의 생육 온도와 습도를 기준으로 분류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온도, 구체적으로는 약재의 광합성 최적 온도가 핵심입니다. 저는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은 끝에 식물 분류 기준이 되는 최적온도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의학 서적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내경’에서 ‘차가운 것은 따뜻하게 하고, 더운 것은 차갑게 하라(寒者熱之 熱者寒之)’는 말이 왜 질병을 치료하는 대명제인지를 깨닫고는 극도의 희열감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지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흐뭇한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식물과 ‘연애’를 하느라 환갑이 다 돼가는 지금도 그는 미혼이다. 그는 아직도 연구 중이다. 서울대 농대 원예학과 출신인 그는 2007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채소작물의 음양오행학적 고찰’이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학위 논문까지 제출해놓은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본업인 농사를 접어두고 학자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다.
“모교인 서울대 후배들에게 식물에도 체질이 있으니 그걸 연구하면 식물분류학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연구를 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따라오지 않더라고요. 할 수 없이 처음 시작한 제가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현재 제 학위 논문이 농학과 의학의 중간지대에 있다 보니 논문 심사를 해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주춤해 있는 상태입니다. 농학에서는 음양오행론에 기반한 약재 이론을 아는 이가 없다 하고, 한의학에서는 식물학을 연구한 사람들이 없다는 거지요.”
이 대표는 지난해 중국의 중의학자가 고대의학서 ‘주후비급방’에 학질약으로 기록돼 있는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치료 성분인 아르테미시닌을 찾아낸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탄 사례를 들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한국의 사상체질의학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의학 이론이자 과학 이론이니 꾸준히 연구하면 노벨상도 받을 수 있는 보고라는 것이다. 또 체질별 식물분류는 당장 한의학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고, 천연식물을 주재료로 삼는 약학계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 남에게 도움되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
의학과 동양철학을 넘나드는 그의 얘기에 푹 빠져들어 있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봤다. 그의 집무실이자 농사를 짓는 터는 경기 일산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농지인데, 전체가 비닐하우스로 되어 있다.
그의 본업은 육묘와 육종 사업. 그는 이곳 비닐하우스 온실에서 식물의 체질분류를 연구하면서 상추, 전대, 배추, 고추, 토마토 같은 채소도 육종해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1982년 대학을 졸업한 후 5년간 국내 굴지의 종묘회사에서 일한 뒤 1987년 독립해 30년 가까이 이 사업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사실 기자는 5년 전 이 장소에서 이 대표를 처음 만났다. 이번이 두 번째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별로 없어 보인다. 그가 육종사업으로 개발해낸 빨간 카네이션도 잘 자라고 있었다.
“어버이날에 주로 쓰이는 꽃인지라 이름을 부모님의 건강과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만수무강’이라고 지어 특허 등록을 해놓은 꽃이에요. 현재 국내 카네이션 시장은 300만 본 정도로 추정하는데 우리나라 농부들이 대부분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고 외국 모종을 사서 기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열 받아’ 토종 카네이션을 개발했던 거지요. 외국산 품종은 삽목묘 1주당 600~700원 정도 하는데, 품질이 좋은 ‘만수무강’을 350원 정도에 농가에 보급하니까 국내 시장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어요.”
그는 카네이션만 10종류의 특허를 갖고 있고 외국 수출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다고 밝혔다. 얼마 전엔 ‘화분용 카네이션’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는데 반응이 썩 괜찮다고 한다. 외형은 5년 전 그대로인 듯한데도 무언가 발전의 에너지가 충만한 분위기다.
“지금까지는 내가 즐거운 일을 해왔기 때문에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그리고 내게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란 결국 나 자신의 이익보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때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농가에 도움이 되는 육종 사업을 지속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그와의 두 번째 온실 방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늦추위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기자에게까지 전해진 때문일까. 미래의 어느날 세 번째 방담에서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기대된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풍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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