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데일리메일’의 특파원으로 한국에서 러일전쟁과 3·1운동을 취재한 프레더릭 매켄지는 한국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일본을 신랄히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그런 그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선 “한국의 독립을 박탈하는 일에 종사했지만 한국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다른 일본인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호감을 얻었으며 존경을 받았다”고 평했다. 친일파들만 만났나 싶어 관련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토 통감은 덕과 공로가 높고 학문은 고금을 통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실로 크게 떠받들고 지탱하여 준 공로가 있기에 짐은 언제나 존중하는 사람이다.”(순종실록 1907년 11월 19일) 순종이 이토를 태자태사로 임명해 영친왕 교육을 맡기고 황족인 친왕(親王)으로 예우하겠다며 한 발언이다. 1905년 을사늑약 후 국권을 빼앗기면서도 왕이 그런 생각을 했으니 대신들이라고 침략의 원흉에 감히 맞섰겠는가.
▷이토가 초대 한국통감으로 서울에 온 것은 꼭 110년 전인 1906년 3월 2일이었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승인해야 한다고 처음 말한 사람은 바로 본인이다. … 일본은 한국을 합병할 필요도, 그런 생각도 없다….” 부임 직후 ‘제1회 한국시정에 관한 협의회’에서 그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지만 당시 지도층은 도로망과 교육시설 건설 등 그가 내보인 당근에만 관심을 쏟았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에 대해 고종과 순종의 탄식을 전한 일본 기록을 보면 배신감이 들 정도다. 망국엔 다 이유가 있다.
▷이토는 “한국에 인물이 있었다면 오늘과 같은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라를 빼앗겼으니 항변도 어렵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은 어떤지 국정을 책임진 정관계 인사들을 떠올려본다. 격동의 한반도에 대한 주변 4강의 이해와 전략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지, 행여 검은 속내를 숨긴 현대판 이토에게 현혹당하는 일은 없을 것인지…. 당대에도 걱정이 태산인데 후대는 이 시대를 과연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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