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정(本町) 1정목 15번지. 남촌의 심장지대인 진고개의 어귀에 있는 경성우편국의 옆골목을 약 백 미터쯤 들어가면 한 채의 광활한 저택이 있다. 그 안에는 하늘 높이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달려, 찬바람에 휘날리고 있으니 그곳이 곧 한말 풍운의 진원지이던 중국총영사관이다.”(동아일보 1936년 1월 3일자)
80년 전의 중국영사관 탐방기다. 중국공사관이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 박탈로 인해 각국의 모든 공사관과 마찬가지로 교민보호 임무만 남은 영사관으로 격하된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 명동의 중국대사관이 있는 바로 그 자리다.
“그 집을 쑥 들어설 때 선듯 느껴지는 바는 야릇한 이국 정서다. 봄날의 종달새와도 같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시끄럽게 지저귀는 이국의 아이들, 유독 누런색과 파란색으로 혼란하게 장식한 건물, 단발에 육체의 곡선미가 여실히 나타나는 가벼운 의복을 걸친 여인네들. 넓은 정원 웅장한 건물에서 숨길 수 없이 나타나는 쇠락의 자취….”
조선 말기 정국을 쥐고 흔들던 외세의 중심이 반세기 지나 쇠잔한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는 이야기다. 기사는 이어서 중국공사관이 되기 전의 이곳 내력을 이야기한다. 흥선대원군의 부하로서 천주교 학살로 그 이름을 떨치던 포도대장의 집이었는데,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서울에 진주한 중국군의 지휘관 숙소와 병원으로 되었다는 것, 단순히 종주국이라는 관념적 우월감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지 임오군란 진압 후로도 철수하지 않고 용산 기지에 주둔했고, 명동의 집은 중국 수뇌부의 조선 경영의 대본영이 되었다가 마침내 중국공사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중국주둔군 총수의 말석 참모가 위안스카이(袁世凱)였는데, 2년 뒤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수훈을 세운 뒤로 조선의 국정을 농단하는 권세가로 떠올랐다.
1887년 9월 11일, 지금의 명동 대사관 자리에서 자칭 ‘총독’, 타칭 ‘중국 총리’로 군림하던 28세의 위안스카이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대외에 표방하는 것을 견제하자’고 본국 정부에 전보를 띄웠다. 미국과 수교한 지 5년이 지나 워싱턴에 처음 파견될 주미 조선공사관원들이 임금의 임명장을 받고 출국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국제무대에서 강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 견제조치가 그로부터 마련되었다. 심지어 어느 나라나 쓰는 ‘전권 공사’라는 명칭에서 ‘전권(全權)’을 떼라는 억지 요구까지 있었다.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기미년 3월 1일의 독립선언서가 있기 32년 전의 일이다.
그 시절로부터 약 130년이 흐른 지금,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가 배치되면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파괴될 수도 있다고 도발적 발언을 한 중국대사에게 위안스카이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한중 수교 1주년을 맞은 주한 중국대사관은 조용하다. ‘중국과학원’ 글씨가 선명한 2대의 대형 위성안테나가 눈길을 끈다.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는 없었다.”(동아일보 1993년 8월 25일자)
23년 전 중국대사관을 방문한 또 다른 기사다. 한중 수교 후 처음으로 대사관을 언론에 공개해 초대 중국대사를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활달한 표정으로 잔치 분위기처럼 대화를 풀어가던 중국대사는 화제가 북한으로 옮겨가자 돌연 태도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하지 않으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제재 조치를 취하는 방안이 검토되던 시절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느낌마저 주는 대목이다. 미국이나 일본과의 결속을 최대한 막아 조선을 중국권 내에 붙잡아두려는 중국의 오랜 집착은 100여 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여전하다.
임오군란 이후 3년여의 중국 억류에서 풀려난 65세의 흥선대원군을 26세의 위안스카이가 호송하여 경기도 남양만으로 입국한 그때로부터 130년이 흘렀다. 지금 사드 배치 후보지로 거론되는 평택의 앞바다이다. 그곳은 위안스카이 시대에 조선 해역에 중국 군함이 출입하는 주된 통로이자 주둔지였고, 위안스카이 시대를 끝내는 청일전쟁 개막 때는 일본이 선제타격을 가한 첫 격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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