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라도 들어왔으면 이 몸에 목소리라도 들어왔으면 이 몸에 아무것도 듣도 보도 못하는 이 막막함! 이 막막함을 붙들고 나는 살아가야 하리 천지사방 분간이 안 되는 이 막막함으로 칠흑의 밤을 더듬거리며 더듬거리며 걷다니 이 막막함을 쫓아가다 넘어져도, 눈멀어도 붙들어줄 그대 목소리 그대의 혼이라도 내게 들어와줬으면.
꽃샘바람 헤치고 저 섬진강에서 매운 향기 올라오고 있다. 여기 한 뼘 키에 고깔모자 쓴 ‘청화백자매조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文壺·국보 170호)’에 도화서 화원이 그린 매화나무 가지에 한 쌍 새 날아들어 마주보며 지저귀는 사랑소리 더불어 ‘봄 온다, 봄 온다!’고 꽃향기 천 리 길 달려오고 있다.
비색청자의 고려를 넘어 조선왕조에 들어 새 빛깔 새 몸매의 분청사기를 들어 올리더니 마침내 나라에서 흰옷 백성의 꿈의 그릇 조선백자를 굽는 가마를 경기도 분원 땅에 짓는다. 청자, 분청사기, 백자. 역사의 격변기에 이룩한 눈부신 개벽은 세계 도자예술사에서 유례가 없는 오직 우리네 옛 도공들의 위대한 발명인 것이다.
이 작은 항아리에는 매화, 대나무, 국화, 새가 돌아가며 조화롭게 청화로 그려져 있고 연꽃봉오리 모양 꼭지를 한 뚜껑에도 매화와 대나무가 휘감아 돈다. 옛 선비들은 권력과 이익에 눈을 돌리지 않고 불의에 허리 굽히지 않는 절의의 정신을 눈바람에도 푸르름과 향기를 잃지 않는 매란국죽에 빗대서 시로 기리고 그림으로 찬미하였으니 신흠은 “매화는 일생토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고 그 높은 절개를 읊었고 고려 말 충신 원천석은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고 시조로 자신의 충절을 노래했다.
바로 물감을 찍어 한 붓에 그리는 몰골화법(沒骨畵法)으로 신들린 듯 완성한 구도와 탑 모양의 작은 항아리는 조선백자가 뽑아낸 최고의 걸작이다.
시인은 이 신품 앞에서 그만 막막한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 ‘넘어져도, 눈멀어도/붙들어줄 그대 목소리/그대의 혼이라도 내게/들어와줬으면’ 하고. 그렇구나, 조선백자여. 너는 따라잡을 길 없는 하늘 밖의 소리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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