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두는 법’이라는 문구가 포털 사이트의 머리마다 추천 검색어로 줄곧 오르는 요즘이다. 그런데 80년 전에도 그랬다.
‘바둑을 배우고저 하는데 바둑에 대하여 쉽게 해득할 수 있는 서적과 가격, 판매소를 알려주시오.’(동아일보 1936년 7월 4일자)
신문의 ‘독자 질의응답란’에 실린 편지다. 정보를 수소문한 편집자는 ‘초심자 바둑 독습’ 같은 일본 서적을 나란히 소개한다. 도쿄나 오사카의 주문처 주소와 함께.
“쓸데없이 담배나 피우고 술이나 마시고 창가 부르고 한담하고 바둑이나 두는 것으로 소일하지 말고 제군과 조선의 장래를 위하여 정신 차려 독서에 힘쓰라”는 식의 독자 투고가 빈발하던 1920년대와는 비교되는 풍경이었다.
이미 조선의 재래식 순장바둑을 넘어 일본식 바둑이 대세로 자리 잡아 가던 때였다. 전문기사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의 취향도 그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추세를 반영하듯 초유의 전국 바둑선수권대회가 1937년 동아일보 주최로 열렸다.
‘제1회 바둑선수권대회가 본사에서 개막했다. 심판부의 규칙 설명이 있었고 경기는 극히 정숙하게 시작되었다. 참가선수는 10인. 이름이 쟁쟁한 대가들이며 멀리서 상경한 분들도 적지 않다. 전국의 국수(國手) 전부가 참가했다. 심판은 3인. 경기 방법은 리그식으로, 모든 선수가 각각 일전을 겨루게 하였다.’(동아일보 1937년 7월 11일자)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바둑의 국가대표를 뽑는 자리였다. 참가 선수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강호들이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지역별로 동아일보 지국들이 주최한 지방 대회를 통해 기량을 검증받아 온 실력자들이었다. 개인 대국뿐이던 바둑이 운동경기처럼 대회의 이름을 걸고 공개적인 대항전을 펼치게 됨으로써 단순한 소일거리나 취미 혹은 친선의 범주를 넘어서게 되었다. 전국바둑대회 소식은 신문의 ‘연예와 오락’ 페이지에 실렸다. 대회 참관 후기는 이 대회의 화제로 떠올랐다.
첫 우승배는 62세 노사초에게 돌아갔다. 7승 2패. 명성 그대로 당대의 최고수임이 증명됐다. 참가자 중 두 선수, 유진하(45)와 이석홍(39)은 노사초의 제자들이다. 둘은 스승의 문하를 떠난 지 10년여 만에 다시 만나 오랜만의 수담을 나누었다. 다섯 집을 접고도 늘 스승에게 패하던 두 제자가 이제 스승과 맞상대하는 수준으로 진보했다. 1년에 반집꼴로 실력이 늘어온 셈이다. 반집 차가 얼마나 큰 것인지 바둑을 아는 사람은 안다. 바둑도 일생을 두어서 어느 정도에 이르면 거의 더는 진보하지 않는 것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두 사람은 과거에도 지금도 적수인데 10년 만에 다섯 집이 강해진 적수로 만났다. 그 감상이 여간 아닌 듯 대국에서 마주해 웃는 미소는 실로 의미심장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옛 스승을 이기진 못했지만 조선의 바둑은 시기를 지날수록 점점 진보하고 있다.
그해 연말 서울 수송동의 경성기원에서는 송년 바둑대회가 열렸다. 그해는 전문기사들이 조선 전래의 순장바둑 폐지를 결의하고 일본식 바둑을 경기 방식으로 공식 채택한 원년이기도 했다. 노사초 등 기단의 중진들이 재력가의 후원을 받아 경성기원을 설립한 것이 1930년이었다.
광복 후에는 1948년부터 조선기원 주최의 바둑선수권대회가 매년 개최됐다. 첫 대회에서 우승한 일본 유학파 조남철은 현대 한국바둑의 선구가 됐다. 6·25전쟁 후 1954년에 발족된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의 본산 역할을 해왔다. 한국바둑은 그렇게 진화하며 일본과 중국을 따라잡고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기원의 기관지가 탄생하여 바둑 연구와 대중화의 물꼬를 튼 다음 해인 1968년 해외에서는 최초의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큰 핸디캡을 걸어놓고서야 프로 바둑 기사와 겨우 대국이 이루어질 정도였던 실력이 48년 만에 오늘의 알파고로 진화하기에 이르렀다. 세월 따라 제자가 스승을 덤 없이 따라잡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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