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의 1, 2국을 지고 나서 인공지능에 지는 인간이 내가 될 수 있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다. 원래 큰 승부를 앞두고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덜 긴장한다고 생각해왔다. 특히 큰 경기 전날에는 ‘무조건 이긴다’는 자기 최면을 걸었다. 자신을 믿고 상대가 어떻게 받을지 두려워하지 않는 게 정상급 기사들의 승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여기고 ‘마인드 컨트롤’에 노력했다. 10여 년간 마인드 컨트롤은 그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바둑계에선 나를 최고의 강심장으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3국을 앞둔 부담감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1, 2국 때와는 달리 대국장에 들어갈 때 딸과 함께 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내 표정에 힘든 기색이 드러나는 걸 딸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문제는 역시 부담감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초반부터 잘못된 길을 걸어갔다. 좌상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알파고의 수순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정확했다. 특히 참고 1도처럼 백 ○를 기준으로 볼 때 밭전자 행마인 백 1(실전 백 32)은 나도 상상하지 못했다. 좋은 수였다.
초반에 크게 망해 이후 수순은 더 살펴볼 것도 없다. 참고 2도 흑 1(실전 흑 99) 대신 먼저 ‘가’의 자리에 둬 백 대마 공격에 나서야 했지만 이땐 이미 어려운 상황이었다. 알파고가 백 6을 둬 백 대마를 사실상 살리면서 승부는 끝났다. 하변에 침입해 억지로 패를 냈지만 그건 아쉬움 때문이지 승부를 뒤집자는 건 아니었다. 3국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알파고와 초반부터 치고받는 것은 금물이라는 점이었다. 다른 곳과 연계되지 않은 전투에서 알파고의 수읽기는 치밀하고 정확했다.
3국은 평소 내 바둑이 아니었다. 심리적 압박감에 실력 발휘도 못하고 무너졌다. 그래서 인터뷰 때 ‘이세돌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알파고와 세 판을 두면서 특유의 습성을 상당 부분 파악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됐다. 또 이번 대결이 내 패배로 끝났다는 점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더구나 4국은 내가 유리한 백번이었다. 밖에서는 0-5의 패배를 점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나는 이제야말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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