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기자가 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원하던 신문사에 들어가 32년 동안 기자 생활을 했다. 특파원도 세 번이나 지냈다. 대학교수로 임용돼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 할 때까지만 해도 ‘순탄한 인생’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강단에 서기 두 달 전 주간지에서 그의 23년 전 기사를 꺼내 문제 삼으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이 영화 같은 실화의 주인공은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신문 기자다.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보도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2014년 고베(神戶)의 한 여대 교수로 임용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2014년 2월 일본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에 보도되자 우익들은 협박 메일과 전화를 쏟아내 임용을 취소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2년간의 싸움. 우에무라 전 기자는 최근 펴낸 책 ‘진실,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에서 자신의 기사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경험을 인생 스토리와 함께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고교 2년생이던 1976년 교토(京都)에서 특별전시 중이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고 난 뒤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반가사유상은 일본이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했다.
이후 와세다대에 진학한 그는 술을 마시면 한국어를 쓰던 재일동포 선배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관심을 갖게 됐고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고바우영감’의 팬이 됐다. 대학 4학년 때 한국 여행에서는 자갈치시장에서 처음 만난 할아버지로부터 아침을 얻어먹으며 한국의 ‘정’을 알게 됐고 관심은 애정으로 바뀌었다.
아사히신문에 입사한 뒤에도 그의 ‘한국 사랑’은 바뀌지 않았다. 1년간 한국에 연수를 다녀왔고,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한국 내 위안부의 최초 증언 테이프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도 관심과 취재의 성과였다. 보도 사흘 뒤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며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전했다는 이유로 우익들의 타깃이 됐다. 특히 강단에 서기 위해 언론사를 떠나며 보호막이 사라지자 공격이 본격화됐다.
우익들은 그를 ‘날조기자’ ‘매국노’ ‘국적’이라고 비난했다. 고교생인 그의 딸의 실명과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고 “자살할 때까지 몰아붙일 수밖에 없다”, “이 녀석을 이지메(집단 따돌림)하는 것은 ‘애국무죄’다. 당당하게 이지메하자” 등의 글을 올렸다. 그가 월 5만 엔(약 52만 원)을 받으며 비상근강사로 일하던 대학에는 “매국노를 고용했으니 학생들과 교직원을 해치겠다”는 협박장이 날아왔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료를 뒤져 기사의 정당함을 입증했다. 우익 언론을 포함해 각종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기고문을 보내며 비난이 사실무근이라는 점을 끈질기게 설명했다. 우에무라 전 기자를 ‘일본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긴 양심 세력도 그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그를 ‘날조기자’라고 공격한 우익 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때는 170명의 변호사가 함께했다.
결국 여론에 떠밀린 대학은 2014년 말 그의 비상근강사 계약 기간을 1년간 연장했다. 지난해 말 다시 거취가 논란이 되자 이번에는 한국 가톨릭대에서 ‘초빙교수로 와 달라’고 제안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현재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살고 있다. 강의실에서는 한일 우호의 역사를 가르치고 법정에서는 우익들과 싸우는 ‘학자 겸 투사’의 생활이다. 그의 책은 이렇게 끝난다. “앞으로도 계속 싸워 나갈 것이다. 결코 굴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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