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서울!]멈춘 곳에서 터득하는 자연의 지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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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닷가 마을에도 봄이 왔다. 바닷바람 사이로 파고드는 따스한 햇살, 코끝을 간질이는 꽃향기가 지천이다. 책방 문을 열고 열 걸음만 나서면 백여 그루의 벚나무가 연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며 심장을 뛰게 한다.

서울에 살 때도 봄은 해마다 찾아왔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어느 때부턴가 계절이 아니라 일 년이 통째로 머물다가 휙휙 스쳐 지나갔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서른여덟 해가 되던 어느 날, 내 시간은 갑자기 뚝 멈췄다. 몸이 많이 아팠고, 생체리듬도 완전히 무너졌다. 더 이상 서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던 우리는 먼 길을 달려 통영으로 내려왔고, 비로소 방전된 몸과 마음에 전원을 꽂았다. 충전은 더뎠고, 이곳의 시계추는 아주 천천히 흘렀다.

어느새 통영살이 만 6년이 지났다. 일에 쫓겨 제대로 된 취미 하나도 없이 살았던 내게 이곳은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고, 꽃을 피우는 삶을 선물했다. 이주 2년 만에 아파트에서 내려와 땅을 밟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틈틈이 열 평 남짓 작은 땅을 일궜다. 유기 퇴비를 뿌리고, 물 빠짐이 좋은 마사토를 섞어서 좋은 토양을 만들어 다양한 모종과 꽃들을 사다 심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오늘은 또 얼마나 컸는지, 새싹은 돋았는지, 꽃봉오리는 생겼는지, 하루하루 생명이 자라가는 신비를 지켜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고, 그렇게 흙과 꽃, 나무와 친구가 되면서 자연의 섭리를 배워나갔다.

꽃이 지고 겨울이 오면 나무들도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최대한 몸집을 가볍게, 단순하게 덜어낸다. 우리 사무실 옆 전혁림미술관에는 ‘꽃 중의 꽃’으로 불리는 모란꽃 정원이 있다. 겨우내 서너 달을 죽은 듯이 잠만 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데 꽃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 그 일주일을 위해 에너지를 최대한 비축하며 기나긴 겨울을 버텨내는 것이다. 겨울이 없다면 꽃도 피어날 수 없다.

굳이 혜민 스님의 조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분명 멈춰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평생 쉼 없이 달리기만을 강요받는 사회, 그 첨병에 서 있는 대도시 서울의 삶에 겨울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꿈일까. 안식년은 대학교수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고, 방학은 선생님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자연이라는 위대한 스승은 어쩌면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꿔 버릴 인생의 지혜를 천천히, 아주 작은 목소리로만 귓가에 속삭인다. 그래서 분주하게 달리기만 하면 그 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
 
정은영

※필자(43)는 서울에서 광고회사 잡지사를 거쳐 콘텐츠 기획사를 운영하다 경남 통영으로 이주해 출판사 ‘남해의봄날’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혁림미술관#모란꽃 정원#혜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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