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 배달되어 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나 읽었다. 긴장한 걱정스런 표정으로 신문지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 곁에서 떠들거나 하면 안되는 것이다.”
청마 유치환 시인의 자전적 산문이다. 1908년생이니까 그가 회고하는 신문 구독 장면은 1920년대의 광경일 것이다. 신문은 돌려 읽는 것이 한국 신문 초창기 이래의 오랜 풍습이었다. 마치 1970년대 어름에 텔레비전 있는 집에 이웃 사람들이 공동 우물가에 모여들듯 하여 시청을 공유한 것처럼.
라디오방송이 이 땅에 처음 개시된 1927년 이전까지 신문은 유일한 뉴스 매체였고 시대를 선도하는 독점적 여론 형성 기구였다. 신문은 1920년 이전에도 있었지만 한국인이 거기에 집단적으로 의지하고 매료된 것은 1920년 이후부터였다. 독립신문을 효시로 한 민간 신문의 전통이 일제의 병합 이후 10년간 단절된 끝에 한국인 경영의 현대식 민간 신문들이 출현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96년 전 이맘때의 이른 봄에 한꺼번에 쏟아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같은 새 신문은 종이부터 인쇄 및 편집과 기사 내용에 이르기까지 1910년 이전의 옛 신문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지금의 스마트폰 못지않은 마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정보혁명이자 기술혁명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00년 가까운 과거에 출현한 그 신문물은 근대의 스마트페이퍼였다고나 할까.
“신문요.”
배달원이 던지는 이 한마디는 이제는 사장된 말이 되었지만 1920년대 초창기에는 지금의 새로 출시되는 스마트폰의 품명만큼이나 신선한 울림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동아일보의 경우 신문사 휘장을 새긴 덧저고리를 유니폼으로 걸쳐 입은 명문학교의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신문뭉치를 들고 대로와 골목길을 종횡으로 뛰며 누비는 광경 자체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물이었다. 가두판매를 겸한 배달청년의 허리춤에 찬 주먹만 한 방울이 딸랑딸랑 울리며 목청과 더불어 화음을 일으킬 때마다 새 소식에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두부장수 요령소리에 이끌려 나오는 주부들 이상이었다. 갓 나온 신문지의 온기는 두부만큼이나 따뜻하고, 그 잉크 내음은 고소한 두부보다 강렬했다.
그 시각, 석양의 종소리에 맞춰 손수레도 함께 달린다. 지방으로 가는 신문 더미를 싣고 우편국으로 기차역으로 향한다. 우편으로 신문을 받아보는 전국의 구독자에게 하나하나 봉투에 담아 주소를 써 보내고, 지국으로 향하는 신문 꾸러미에 행선지를 적어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노선별로 시간에 늦지 않게 화물칸에 싣는다. 신문 한 부에 3전, 한 달 치는 선불 60전. 지방 우송료 15전 추가. 그렇게 시작한 신문대금은 이후 오랫동안 1원 시대를 이어갔다. 주요 교통수단인 전차 요금이 5전이었으니 요즘과 큰 격차 없는 가격대라 할 수 있다.
초창기에 광고는 적었다. 지면은 종이 한 장을 반으로 접은 4면을 기본으로 출발했다. 24년 전 발간된 독립신문이 4개면이었다. 창간호는 특별히 종이를 두 장 접어 8면으로 꾸렸다. 그렇게 1만 부 내외의 발행으로 1920년 봄에 출범한 3개 신문 중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말기와 6·25전쟁의 단절기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1920년 4월 1일. 훗날 소설 ‘상록수’와 시 ‘그날이 오면’을 쓰게 되는 심훈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매였던 언론을 트기 위하여 동아일보라는 좋은 내용을 가진 신문이 창간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4월 30일. 독립신문의 후반기에 주필을 맡았던 윤치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지금 서울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신문은 3종이다. 독립을 추구하는 동아일보, 동화정책을 선도하는 시사신문, 중도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조선일보. 그중에서 동아일보가 제일 인기가 높다.”
그리고 96년이 흘렀다. 4월 1일은 동아일보가 탄생한 날이며 7일은 120년 전 독립신문이 탄생한 날, ‘신문의 날’이다. 종이 위에 쓰는 글이든 액정화면 위에 띄우는 글자이든 그것은 최종적으로 뇌리에 박히는 활자일 것이다. 신문은 기술과 더불어 진화하는 중이다. 그의 독자도 진화 과정에 있는 것일까. 사람은 매체를 만들고, 매체는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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