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부터 ‘킹스맨’까지, 영국산 스파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활약하고 있다. 제목에 지명을 넣어 원산지를 ‘과시’한 드라마 ‘런던 스파이’는 영국산 스파이의 최신 버전이다. ‘007’ 최근 시리즈에서 요원 Q 역을 맡았던 벤 위쇼와, ‘킹스맨’의 조연 에드워드 홀크로프트가 주인공을 맡았다.
시작은 요즘 말로 하면 ‘그린 듯한’ 게이 로맨스다. 세상을 막 살던 대니는 어느 날 아침 조깅을 하던 한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다.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대니는 그와 연인이 된다. 사람과 관계 맺기에 서툰 남자와, 인생을 대충 사는 만큼 사람과의 관계 역시 늘 쉬웠던 대니. 둘은 서로의 상처를 나누며 깊은 사이로 발전한다.
어느 날 남자가 증발해 버리면서 로맨스는 서스펜스로 변한다. 그를 무작정 찾아다니던 대니는 우연히 그의 아파트에서 트렁크에 갇힌 채 숨진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가 살해당했다고 확신하는 대니는 진상을 캐기 시작하지만 대니의 시도는 번번이 막히고 오히려 진실 따위는 상관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는다.
드라마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실은 첩보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암시한다. 상대가 원하는 나를 적당히 연기하며, 상대의 마음을 훔치면 된다. 대니는 사랑에서 깨어나 상대의 진짜 모습을 직시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드라마 속 남자들은 스파이 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는 존 러 카레이 작품의 스파이 모습과 닮았다. 평범하게 살 권리를 박탈당한, 불안과 회한에 시달리는 망가진 남자들 말이다. 스파이물은 남자들이 함께 위기를 넘기며 비밀 임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브로맨스(‘브러더’와 ‘로맨스’를 합친 말로 남성 간의 애틋한 관계를 뜻함)의 성지였다. ‘런던 스파이’는 아예 이들을 커밍아웃시킨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은 스파이의 삶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고, 임무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상대의 진실을 해체하며 그를 더 깊이 알게 된 대니처럼, ‘런던 스파이’는 우리가 알던 스파이물을 해체한 뒤 게이 로맨스와 결합해 재구성하며 긴장감과 애틋함을 적절히 배합한다. 고성능 도청 프로그램과 무인기가 인간 스파이를 대체하는 시대에도, 스파이물은 이렇게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팬들을 끌어들인다. 영국산 스파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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