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아까 봤지. 우리 팀장 말이 안 통해. 오늘도 고구마 100개….” “근데 서현 씨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거 봤어? 완전 핵사이다∼!”
편의점에 들러 사이다를 사려던 에이전트 7(임희윤 기자)과 에이전트 5(김윤종 기자)는 20대 후반 직장인 남녀의 대화에 흠칫 놀랐다. 지구인이란 늘 말이 많다. 그들은 회사 내 답답한 상황, 시원한 상황을 고구마, 사이다로 묘사했다. 사이다라…. 시원한 탄산의 느낌엔 일단 공감. 근데 소화제도, 계곡 물도, 가을 하늘도, 콜라도 있건만 왜 하필 속 시원한 상황을 사이다에 빗댈까. ‘동치미부터 칵테일에까지 두루 쓰이는 사이다는 외계 문명이 선물한 만병통치약? 아니면 사이다는 외계어?’
조사를 시작했다. ‘꿀-’(요긴한, 달콤한), ‘단호박’(단호한 인물이나 상황), ‘라테’(부드럽고 편안한 느낌), ‘고추장’(사소한 것을 아끼고 궁상떠는), ‘쿠크다스’(얇은 과자처럼 부서지기 쉽고 약한)…. 왜 젊은이들은 음식, 음료수, 식품으로 감정이나 상황을 표현할까. ○ 사이다는 공감각적 음성 이모티콘
“답답할 땐 ‘고구마 100개’, 비슷한 말은 ‘삶은 계란’. 그 반대가 사이다. 그 상징성이 한 방에 공감되니까 덩달아 쓰게 되더라고요.”(대학원생 구혜린 씨)
그렇다면 왜 콜라는 안 되나. 환타, 맥주는? “콜라는 ‘ㄹ’이 두 번, 환타랑 맥주도 ‘ㄴ’ ‘ㄱ’ 받침이 들어가서 발음이 부드럽지 않아요(웃음).”(30대 회사원 오모 씨)
거리와 인터넷엔 사이다의 비유가 널려 있었다. 광고에서는 ‘사이다 같은 세일’,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선 ‘사이다 같은 후보’란 문구가 펄럭인다. 지난달엔 SBS 라디오 프로그램 ‘남희석의 사이다’가 신설됐다. 2월엔 4인조 걸그룹 사이다가 데뷔했다. 사이다는 어느새 우리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명예 에이전트’ 김헌식 문화평론가도 ‘단호박’ 어조로 말했다. “투명한 색채와 기포의 시각, 달콤하게 톡 쏘는 미각, 뻥 하고 열린 뒤 ‘쏴아∼’ 소리 내는 청각이 복합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음료가 사이답니다. ‘주스∼.’ 느낌 안 오죠?”
좀 더 정밀한 언어학적 분석이 필요했다. 정희창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에게 ‘꿀팁’(요긴한 지혜)을 구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신저의 특성이 음성 대화에까지 영향을 미친 겁니다. 짧고 간결하면서 많은 것이 함축된 단어를 선호하죠.”
종합해보면 사이다는 ‘음성으로 된 이모티콘’이다. 메신저에서 대화 중 긴 설명 없이 이모티콘을 골라 띄움으로써 심리나 특정 상황을 한 번에 표출하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대면 소통에서마저 ‘사이다’ ‘꿀’ ‘고구마’를 이모티콘처럼 띄우는 것이다. ○ 사이다, 허니, 바나나…. 말장난의 장난 아닌 효과
사이다 열풍은 요즘 탄산수, 탄산음료 붐과도 연결된다. 불황일수록 탄산음료가 잘 팔린다는 유통업계 속설도 있다. 이마트에 알아봤다. 지난 한 해 동안 171억 원어치의 사이다가 팔렸다. 탄산음료 매출은 지난해 482억 원으로 늘었다. 탄산수 매출액은 43억 원에서 85억 원으로 두 배로 증가.
사이다, ‘꿀-’, ‘나한테 바나나(반하나)’ 같은 언어유희의 인기는 식음료 시장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친다. 이마트에서 꿀 매출은 1년 새 79억 원에서 85억 원으로 늘었다. 이마트에서 ‘허니’가 들어간 제품은 1657종에 이른다. 지난해 허니 열풍은 올해 바나나로 이어졌다. 국순당은 바나나맛 주류인 ‘바나나에 반하나’를 한 실내포차 체인에서 시범적으로 판매했는데 반응이 좋다. ‘초코파이 바나나’ ‘몽쉘 바나나’도 요즘 인기다. 홍보대행사 커뮤스퀘어의 김철호 대표는 “요즘 젊은이는 소비자이자 SNS를 통한 광고 전달자 역할도 한다”고 했다. “허니, 바나나 같은 핫 키워드 트렌드를 빨리 잡기 위해 SNS 모니터링을 수시로 하는 회사도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적 해답을 찾으려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다.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이다는 세상을 정확하게 반영한 말. ※결론: 사이다=외계어가 아닌 지구어.
우린 지구인의 영욕이 담긴 사이다 한 캔을 따 단숨에 들이켰다. …목이 따가웠다. 편의점 문을 열어젖히자 담백한 피자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왔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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