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처소 ‘교태전’, 원형과 다른 궁궐 현판들로 둘러싸여
문화재청 조사 보고서에서 드러난 현판 왜곡 실태
경복궁 등 4대 궁궐의 현판 24개가 글씨 색과 바탕색이 뒤바뀌는 등 원형을 잃은 것으로 조사됐다. 일제강점기 사진을 통해 고증이 가능한 조선시대 궁궐 현판 넷 중 하나는 엉뚱한 모습으로 둔갑한 것이다. 특히 이 중에는 왕이 정사를 보는 핵심 전각으로 창덕궁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 등 국보, 보물 6곳이 포함돼 광화문 현판 논란 못지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광화문은 상징성은 있지만 국보나 보물이 아닌 비지정 문화재다.
문화재청이 최근 발간한 ‘궁궐 현판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현판을 촬영한 일제강점기 사진 95건과 현재 모습을 비교 분석한 결과 24개 현판에서 30건의 원형 훼손이 발견됐다. 문제의 24개 현판에는 창덕궁 편전인 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과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明政殿·국보 제226호)을 비롯해 창덕궁 돈화문(敦化門·보물 제383호), 인정문(仁政門·보물 제813호), 주합루(宙合樓·보물 제1769호), 경복궁 향원정(香遠亭·보물 제1761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6개가 포함돼 있다.
현판들의 원형 훼손 양상은 글씨 색과 바탕색이 잘못된 경우가 15건으로 가장 많았고 △테두리 형태가 바뀐 게 5건 △단청이나 장식 오류 9건 △설치 위치 오류 1건으로 각각 나타났다. 예컨대 경복궁의 양의문(兩儀門)과 응지당(膺祉堂), 함홍각(含弘閣), 건순각(健順閣) 등 10개 전각의 현판은 일제강점기 사진에는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였지만, 현재는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글씨로 채색돼 있다. 바탕색과 글씨 색이 서로 뒤바뀐 셈이다. 고종의 글씨가 새겨진 경복궁 향원정 현판은 사진상으로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이지만, 보수 과정에서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바뀌었다. 보고서는 “고종의 어필이 새겨진 현판이라는 이유로 글자를 금색으로 (잘못) 격상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궁궐 중에서는 광복 이후 복원 정비가 가장 빈번하게 이뤄진 경복궁이 18건으로 전체 원형 훼손 건수의 60%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왕비가 거주한 침전인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일대의 오류가 특히 심했다.
경복궁 교태전은 광화문과 흥례문, 근정문을 차례로 통과한 뒤 왕이 정무를 보던 근정전, 사정전을 거쳐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지나야 닿을 수 있다. 왕비의 침전답게 궁궐 깊숙한 곳에 후원인 아미산과 여러 전각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구중궁궐(九重宮闕)’이다. 7일 찾은 교태전에는 외국인 관광객 한 무리가 아미산 굴뚝과 화계(花階)의 꽃내음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날 관광객들이 열심히 둘러본 교태전은 원형을 잃은 궁궐 현판들로 둘러싸인 사실이 조사 결과 드러났다. 우선 강녕전에서 교태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문인 양의문 현판부터 글씨 색과 바탕색이 서로 뒤바뀐 상황이다. 이 현판은 일제강점기 촬영 사진에서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였으나, 현재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돼 있다.
이뿐이 아니다. 교태전을 양옆에서 떠받치듯 좌우로 자리 잡은 전각인 원길헌(元吉軒)과 함홍각 현판도 양의문처럼 글씨 색과 바탕색이 서로 바뀌었다. 교태전 바로 뒤쪽에 있는 건순각 현판도 마찬가지다. 교태전을 상, 하, 좌, 우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전각과 문의 현판들이 모두 원형을 상실한 셈이다. 이들은 모두 1995년 침전 영역 복원공사 당시 건물과 함께 새로 제작됐다. 복원 당시 현판에 대한 원형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문화재청은 김대현 문화재활용국장이 주재한 지난해 11월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에서 문제가 된 현판을 즉각 교체하기보다 향후 노후에 따른 수리 시 원형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