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열리는 주주총회는 기업이 지난 한 해 성적표를 공개하고 이사 선임, 정관 변경 등 경영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는 자리다. 주총을 보면 해당 기업의 오늘과 내일, 그리고 기업을 이끌어가는 오너들의 속내가 읽힌다.
명품을 부탁해!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
이부진(46) 사장은 지난 3월 11일 서울 장충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호텔신라 주주총회에 의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지난 2015년은 이 사장에게 다사다난한 한해였다. 회사의 명운을 걸고 직접 진두지휘한 HDC신라면세점 사업권을 따내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개인적으론 이혼 소송이 장기전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달갑지 않은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됐다. 그런 탓에 지난해 10월 호텔신라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끝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자제해왔던 이부진 사장이 공식석상에 선 것은 넉 달여 만이다. 블랙 원피스에 화이트 롱재킷을 매치하고 진주 귀걸이로 포인트를 준 패션 감각은 여전했다.
2012년부터 5년째 의장을 맡아 주총을 진행한 이부진 사장은 한층 자신감이 넘치고 노련해진 모습이었다. 이날 그는 지금까지 이뤄 온 양적 성장과 질적 혁신을 바탕으로 올해는 견실한 경영 체제를 확립하는 해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후 각 사업 부문별 역점 과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면세점 수익성 강화를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고객군 유치, 온라인 사업 확대·최신 IT 도입 적극 추진 등을 제시했고 호텔 분야와 관련해서는 시장의 트렌드와 고객의 요구를 먼저 파악하고 차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선보이겠다는 복안을 밝혔다.
최근 호텔신라를 둘러싼 가장 큰 화두는 지난해 12월부터 부분 개장한 용산 아이파크몰 내 HDC신라면세점의 영업 상황과 4번의 실패 끝에 3월 초 서울시 승인을 얻어낸 도심형 한옥호텔에 관한 것. 특히 HDC신라면세점의 성공은 명품 브랜드를 얼마나 유치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부진 사장은 주총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면세점에 관해서는 “명품 유치가 계획대로 잘 되고 있다. 열심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HDC신라면세점은 ‘명품 빅3’로 불리는 샤넬 · 루이비통 · 에르메스의 입점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등기이사로 컴백, 이미지 쇄신 노리는 최태원 SK 회장
최태원(56) SK그룹 회장은 3월 18일 열린 그룹 지주회사 (주)SK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로 컴백했다. 2014년 2월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모든 계열사 대표에서 물러난 지 2년 만이다. 사실 최 회장의 경영 복귀에 대해서는 쉽지 않을 거라는 관측도 있었다. 주주들 가운데는 횡령 혐의로 형사 처분을 받은 그가 투명 경영을 실현할 수 있을지에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있었고, 지난해 8월 광복절 특사로 출소한지 몇 달만에 내연녀와 딸이 있다는 사실을 전격 고백하며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점도 악재였다. 어쨌든 주총이라는 험난한 고비를 넘은 최 회장에겐 이번이 경영 능력을 발휘해 이미지 쇄신을 할 수 있는 찬스. 하지만 국세청이 최근 최 회장의 내연녀 김모 씨의 아파트를 시세보다 비싼 가격으로 매입해 논란이 된 SK그룹 싱가포르 법인 버가야인터내셔널에 대해 위법 사항이 없었는지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SK그룹은 또다시 오너리스크의 부담을 안게 됐다.
웃음 속 긴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지난해 아모레퍼시픽의 경영 성적표는 “참 잘했어요”다. 연매출 5조원(5조6천6백12억원)을 넘어섰다. 설화수도 단일 브랜드로는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돌파하고 3월 말 도산공원 인근에 단독매장을 오픈했다. 이에 힘입어 서경배(53)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이 보유한 아모레퍼시픽과 아모레G 등의 주가 총액은 9조3천여 억원(2015년 12월 17일 기준)으로 1년 동안 3조2천억원이 증가했다. 서 회장은 3월 1일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6 세계 억만장자 리스트’에서도 지난해보다 52계단 상승한 148위에 랭크됐다.
하지만 속사정을 살펴보면 마냥 웃을 수 있는 상황만은 아니다. ‘영원한 2위’에 머물 것 같던 LG생활건강 역시 지난해 매출 5조원(5조3천2백85억원)을 돌파하며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고 있기 때문.
서경배 회장은 3월 18일 열린 아모레퍼시픽그룹 주총에서, 올 한해에 설화수, 이니스프리, 라네즈, 마몽드, 에뛰드하우스 등 5대 브랜드를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 공략을 확산하고 차세대 신규 브랜드를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인구 1천만명 이상의 메가시티를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을 확대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날 도서출판과 판매업 등을 사업 목적 추가 안건으로 의결한 점도 눈에 띈다. 이는 아모레퍼시픽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의 도록을 제작하기 위해서라고. 아모레퍼시픽은 현재 경기도 용인에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내년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 중인 서울 용산 사옥에도 미술관을 오픈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재 출연하고 배수진 친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2003년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남편을 대신해 11개 계열사를 거느린 현대그룹을 이끌어온 재계 여장부 현정은(61) 회장은 배수진을 치고 승부수를 띄웠다. 3월 18일 열린 현대상선 주총에서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이에 앞서 현 회장은 현대상선 경영 정상화를 위해 사재 3백억원을 출연한다고 발표했다.
현대상선은 2009년부터 글로벌 해운 경기 침체로 고전 중이다. 이미 자본잠식률이 60%를 넘어서, 이 상태가 계속되면 2017년 상장 폐지(자본잠식률 50% 이상이 2년간 계속될 경우)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현대상선 주주들은 자본 잠식 상태를 벗어날 수 있도록 7 대 1 감자를 결정했다. 자본금이 줄면 자본잠식률도 떨어진다. 하지만 감자는 어디까지나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경영 개선이 시급하다. 현대상선은 채권단과 출자전환 협상, 계열사 현대증권 매각 등 경영 정상화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현정은 회장의 사퇴는 현대상선이 위기 탈출을 위한 고강도 자구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립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뒤로 한 발 물러선 것이라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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