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사에서 유명한 시집의 초판 복각본이 큰 인기를 모으는 중이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백석의 ‘사슴’, 정지용의 ‘정지용시집’,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용운의 ‘님의 침묵’ 등이다. 종이 질감이나 인쇄 제책 상태가 원본을 재현한 수준은 아니지만 흉내 수준에서 원본의 분위기를 적당히 누릴 수 있다.
외국에서는 저명 작가의 초판본 거래가 꾸준하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년) 초판본은 우리 돈 약 250만 원부터 1억2000만 원 사이의 다양한 가격대로 거래된다. 어떤 초판본은 왜 1억 원이 넘는 걸까. 서점 측에 따르면 염소가죽 재질로 특별히 만든 상자에 보관돼 있으며 커버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약간 찢어진 곳은 말끔하게 수리해 놓았고 책등 부분 커버는 색까지 정교하게 복원했다.
‘위대한 개츠비’ 초판 커버디자인은 스페인 출신으로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미국에서 활동한 프랜시스 쿠갓의 작품으로 ‘천상의 눈(Celestial Eyes)’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피츠제럴드는 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필자가 갖고 있는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판본은 이관용(1894∼1933)의 취리히대 박사학위논문 ‘의식의 근본사실로서의 의욕’(1921년)의 단행본이다. 이 논문으로 이관용은 한국인 최초의 철학박사가 되었다. 이관용은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인 이원조의 장인이다. 이원조는 시인 이육사(이원록)의 동생이다. 이관용의 딸과 이원조가 혼인할 때 주례는 유석 조병옥이 맡았다. 이관용은 정미칠적(丁未七賊)의 한 사람인 이재곤의 아들이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와 신간회 활동 등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네덜란드 고서점에서 입수한 이관용의 독일어 저서를 ‘읽지는 못하고 만져 볼 때마다’, 그의 시대와 주변 인물들을 떠올리곤 한다. 초판본은 내용이 아니라 실물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다. 서울 구기동 삼성출판박물관, 장충동 한국현대문학관, 서소문 아단문고는 민간 차원에서 우리 문학사의 실물 콘텐츠를 보전해온 드문 곳들이다.
‘문학진흥법’의 국회 통과에 따라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서울 은평구와 동작구, 대구, 광주, 경기 파주시와 군포시, 강원 춘천시와 강릉시, 충북 청주시, 전북 군산시, 전남 장흥군 등 10여 곳이 유치 의사를 보였다 한다. 초판본의 매력을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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