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는 이탈리아의 조각가입니다. 여덟 살 때 교황 앞에서 그린 성인의 초상으로 일찍이 천재성을 인정받았어요. 이후 8명의 교황과 많은 추기경들이 후원자를 자청했지요. 종교개혁으로 훼손된 가톨릭의 권위를 회복시킬 미술가가 필요했거든요. 그렇다고 조각가의 예술 역량이 종교 미술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습니다.
‘페르세포네의 납치’는 그리스 신화를 다룬 조각입니다. 후원자, 보르게세 추기경을 위해 만든 네 개의 대리석 조각 중 하나였어요. 조각의 주인공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입니다. 지하세계 신이 여인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군요. 반면 대지 여신의 딸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하데스가 한눈에 반한 페르세포네의 납치를 시도 중입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꼈다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문제는 하데스의 사랑 방식입니다. 관계의 기본 절차를 무시했지요.
일방적으로 시작된 만남이 순조로울 리 없습니다. 분노한 어머니가 딸을 데리러 지하 세계에 당도했지요. 이별은 예견된 수순이었지만 하데스는 끝까지 상대방의 진심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았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곁에 두려고만 했습니다. 하데스가 권한 지하세계의 음식을 먹은 페르세포네는 완전히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지하와 지상을 오가며 불안정하게 살아야 했지요.
조각은 팽팽히 맞서던 남녀가 힘의 균형을 이루는 찰나를 포착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죽음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었지요. 당대인들은 유한한 인생이 무대 위 연극처럼 언젠가 끝날 것이라 생각했어요. 삶과 현실을 연극과 무대로 여겼습니다. 완력과 저항을 극적으로 형상화한 조각은 이런 시대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연극의 한 장면처럼 박진감 넘치는 조각에 감탄이 이어졌습니다. 명연기를 펼치는 배우처럼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에 갈채가 쏟아졌습니다. 황홀한 연극과도 같은 조각은 ‘기적’이라 불렸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목숨까지 빼앗는 일이 끊이지 않아서일까요. 탁월한 구성과 표현보다 조각에 담긴 내용에 주목하게 됩니다. 조각은 상대방의 진심을 간과한 관계의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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